“북·소련·중의 치밀한 공모…명백한 불법 기습 남침”

“북·소련·중의 치밀한 공모…명백한 불법 기습 남침”


2차 대전 후 전쟁 반대 의지가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로 결집. 

21개국 군대 파병으로 韓 도와 열세였음에도 반공정신 ‘한뜻’ 남침 강행, 

명백한 증거 다양해 호국·참전용사 희생정신 계승을




“6·25전쟁은 국제평화를 파괴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한 유엔의 전쟁이자 국제전쟁.”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박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남 박사는 6·25전쟁을 ‘내전’이라 규정짓는 의견에 대해 전쟁을 너무 단순화한 ‘진부한 의견’이나 ‘단견’이라고 강조했다. 


남 박사는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다양하다”면서 “유엔은 북한의 남침에 대해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신속히 파병을 결정하고 지속적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6·25전쟁에 대해 남·북 간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세계사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6·25전쟁을 ‘내전’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6·25를 너무 단순화하거나, 또는 한반도 내로 국한해서 보려는 일부 학자들의 진부한 ‘주장’이나 ‘단견(短見)’이 아닌가 싶다. 소련 자료에 의하면 6·25남침은 북한·소련·중국의 치밀한 공모 및 지원 아래 발발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도 북한의 남침을 단순히 국지도발로 보지 않고 국제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판단했기 때문에 한국에 유엔군을 파병하고 지원했다. 그런 점에서 6·25는 남북한 간의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국제평화를 파괴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한 ‘유엔의 전쟁’이고, 25개국이 참전한 ‘국제전쟁’이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유엔군 참전 과정을 보면 당시 소련이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음에도 파병 결정이 가결됐다. 


“우리에게 다행스럽게도 거부권 행사가 가능했던 소련이 미국 시각으로 6월 25일 안보리 소집에 불참했다. 당시 소련은 1949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대륙을 공산화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수립하자 중공이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다른 상임이사국들의 반대로 중공의 상임이사국 진출이 무산되자 1950년 1월부터 안보리 회의에 불참했다. 이후 8월 1일부터 의장국 순번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결국 소련은 한국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군사지원 결의에 대한 거부권 행사 기회를 놓치게 됐다.” 



◇ 하지만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입장에서 보면, 거부권 행사가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북한은 남침을 1개월 작전으로 계획했다. 소련은 북한이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것으로 예상하고 8월에 안보리에 참석하게 되면 모든 상황이 종료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낙동강방어선이 형성되고 미국이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하며 이런 계산이 틀어졌다.”



◇ 2차 대전 후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임에도 유엔 21개 국가가 신속한 파병에 동의했다. 이런 결정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다. 


“당시(6·25) 참전 국가들을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국이나 2차 대전 참전국인 경우가 많다. 그 국가들의 강한 전쟁 반대 의지가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로 결집됐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기습 무력 남침에 대해 ‘유엔헌장에 대한 위반’이자 ‘국제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유엔회원국 21개국이 군대 파병을 결정한 것은 당연하다. 이 중 전투부대 파병 국가가 16개국이나 됐다. 나머지 5개국은 의료지원부대를 보내 대한민국을 도왔다.”




▲ 1994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소련의 1급 극비 외교문서

이 문서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 아직도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남침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는 증거를 소개해 달라.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1994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소련의 극비 외교문서를 건네줬다. 이 문서는 남침을 위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모의했고, 전쟁 중에는 어떤 문제를 논의하고 조치했는지를 담고 있는 소련의 극비 1급 외교문서였다. 이 문서에 의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승인했고 마오쩌둥은 지원했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공개한 ‘남침작전계획 상황도’와 전쟁 중 노획한 북한군 정찰명령서·전투명령서, 그리고 남침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 이상조의 증언 등이 있다.”




▲ 소련군사 고문단의 지도하에 작성된 ‘남침작전계획 상황도’ 

이 작전계획은 38선 이북이 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한 남침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 개전 당시 우리 군은 북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세였음에도 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그 원동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바로 반공정신이다. 불과 5년 전 정부수립을 전후해 공산주의 실체를 경험했기 때문에 국민은 다시는 우리 자식들에게 ‘공산식민지’를 물려줘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우리 국민은 전쟁 이전 북한 및 남로당에 의해 자행된 여순 10·19사건이나 북한인민유격대 남파, 38도선에서의 군사적 도발 등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국민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북한보다 열세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민·관·군이 모두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 현재 북한이 한국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과의 직접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전쟁 당시 한국 정부는 ‘북진통일’이 목표였기 때문에 휴전을 의미하는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정전협정 서명은 곧 영원히 통일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겼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국에 한국 안보에 대한 무한책임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신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이 반대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또한 한국은 1954년 일종의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제네바정치회담에 참가했지만 북한 등 공산권 측의 무성의와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 전례로 볼 때 평화협정 자리에 정전협정 당사자인 미국은 되고, 한국은 안 된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밖에 볼 수 없다.”



◇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6·25전쟁이 점점 잊히고 있다. 국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한민국에 6·25는 결코 잊혀서도, 잊힐 수도 없는 전쟁이다. 당시 어린애와 노인만 빼고 모두 참가한 총력전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분의 희생이 있었다. 군인과 경찰은 물론이고, 학도의용군, 지게 부대 노무자, 여군, 카투사, 반공청년들이 그들이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고귀하고도 성스러운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그분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는다. 아울러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봉사에 대한 고마움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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