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10-

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10-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넘겨보자.

창고에 구식 무기가 넘치게 많아지자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재고 정리 목적과 외교 영향력 강화 차원에서 다량의 구식 총들을 근세 조선에 넘겼다 일본의 대량무기 불하는 임오군란 직전에 있었다. 1880년 전후가 아닌가 한다.


1881년, 신식 군대 편성에 관심이 있었고 아직은 국력이 약했던 일본에 별다른 경계심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재고 무기와 훈련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 禮造]소위를 파견 받았다. 조선은 80명 규모의 별기군을 편성해서 신식 훈련을 하다가 임오군란의 대변란을 겪게 되었다. 호리모토는 살해당하고 별기군은 잠정 폐지되었다.


[별기군 – 1년 정도 존재하다가 임오군란 후 해체되었다. 장비한 소총은 일본이 넘겨 준 스나이더 소총으로 보인다. 차고 있는 탄약집이 이 총이 탄약총임을 말해준다.]


마치 덤핑하듯 잡다한 무기들이 조선으로 처분되었으나 그 중 한양 주둔 경군[京軍]에게 지급한 스나이더 총이 역사의 초점이 된다. 이 총은 동학 농민 혁명 시기까지 조선 관군의 주력 소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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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지급의 각 소총에는 일본 왕실의 문장인 국화가 찍혀있는데 이런 총은 외국에 넘겨주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패배한 일본군은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의 새겨진 이 국화 무늬를 지워서 연합군에 양도하는 쓸데없는 짓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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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일본군에게 장비했었던 스나이더 소총들이 아니라 각 번에서 몰수한 잉여 엔필드 소총을 개조한 스나이더 총을 주었을 것이다. 앞 회에서 말했던 메이지 정부가  대대적인 스나이더의 개조 사업을 시작한 1879년과 스나이더 소총을 조선에 넘겨준 시기가 묘하게 맞물리는 것이 눈에 띈다.


당시 그런대로 신식인 스나이더만 넘겨 준 것이 아니었다. 이 무렵 넘겨준 총기 중에는 그 시기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독일제 게베르 소총도 있었다. 기록으로 볼 수는 없지만 메이지 정부가 귀찮게 생각한 여러 종류의 뇌관총도 상당수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화승총 시대에 있었던 조선은 거저 주는 구식 뇌관총만 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우리의 국내 박물관에서 내홍총이라고 잘못 알려진 튜브 락 총도 이때 들여왔을 가능성이 크다[앞에서 언급]. 이때 도입했거나 추가로 도입한 스나이더 총으로 경군[京軍], 즉 수도권 부대들이 축차적으로 장비하였다.


조선이 개방되면서 여러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등의 단발 소총들이 도입되었으나 만성 적자국이었던 조선은 끝까지 모든 화승총을 교체하지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 농민 혁명 때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이 노획한 무기 품목에 다수의 화승총들이 보인다. 몇 년 전 [앞 회에서 소개]일본 동포가 시중에서 구입하여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었던1901년 강화영의 총이 전형적인 화승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화영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화승총 – 앞에서 노획한 동학군의 화승총이라고

한 것은 오기[誤記]였었다.]



일본의 스나이더 소총은 다 폐기 처분된 것이 아니었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예비군 격인 후비보병 [後備步兵]을 동원했다. 5연발총인 22년 식 8mm 무라다 소총은 주전장인 만주로 파견되는 정규군에 보급되고 조선에 파견 된 후비보병들에게는 구식 스나이더 소총이 주어졌다. 우금치 고개에 파견된 미나미 부대[ 휘하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1 개 중대] 의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했었다.


우금치에서 동학 농민군이 괴멸된 뒤에도 일본군 후비보병의 토벌은 남쪽으로 확대되며 이어졌다. 토벌이 계속되자 스나이더 소총의 실탄이 부족해졌다.일본 전사를 보면 동학군 토벌 일본군이 일본 군수사령부에 이미 생산 중단되었던 스나이더 소총 탄약의 추가 생산을 요청했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동학 농민혁명의 분수령이 된 우금치 전투에는 서울의 감영들 병사들, 즉 경군이 파견되었다.이 경군들은 거의 스나이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군들이 뇌관총이나 화승총 같은 전장총으로도 장비하고 있는 정황이 보인다. 우금치에서 돌격하던 동학 농민군 한 참전자의 회고에 의하면 2열 횡대의 관군들은 먼저 전열이 능선에 뛰어 올라와 서서 쏴 자세로 일제 사격을 하고 뒤로 뛰어 사라지면 후열이 뛰어 올라와서 일제 사격을 하고 다시 뒤로 뛰어 사라지고 장전을 완료한 전열이 다시 올라와 사격을 하는 교대 사격을 했었다. 


이것은 후장식 스나이더의 전투 사격 방식이 아니다. 즉 전후 두 줄의 전투대가 장전과 사격을 교대로 하는 화승총 사격의 전투 방식인 것이다. 후장식 사격의 방법이라면 능선에 엎드려 쏴 자세로 계속 사격을 했을 것이다.


[우금치 전투 상황도] 


되풀이 말하지만 화승총이건 수석식이건 전장식 소총은 총구에 화약을 붓고 탄을 장전하려면 이렇게 2열이 교대로 장전과 사격한다. 일본의 노부나가가 다케다 부대를 화승총으로 전멸시킨 나가시노 전투나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카[小西 行長]의 부대가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의 부대에 사용했었던 전법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우금치의 조선군이 후장총인 스나이더 소총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개조를 하지 않은 뇌관식 전장총이나 다른 형태의 화승총을 사용했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즉 일본이 넘겨준 총 중에 개조하지 않은 프랑스제 미니에나 영국제 엔필드 총 같은 전장총도 있었다는 것을 이 사실로도 조금 추리해볼 수가 있다. 


아래의 사진은 일본군의 강요에 의해서 평양까지 일본군 지원을 나간 이 진호 지휘의 조선군이 청군 포로를 감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이 특수 훈련을 시킨 정예 교도 중대라서 그런지 전장총의 특징인 화약이 들어있는 프래스크와 연환 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스나이더 같은 후장총으로 무장했슴을 말해준다.


[이진호 지휘의 조선군 정예 교도중대가 감시하는 청나라 포로들. 

이 중대는 우금치 전투에서도 참전했었다.]


당시 동학 농민군이나 민간에서는 관군의 스나이더 소총의 사거리가 일 천보가 넘는다고 해서 천보총[千步銃]이라고 불렀다. 화승총의 100미터도 안 되는 짧은 사거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면 신식 총기에 이런 이름을 부여할만하다.


동학 농민 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이 봉기의 마지막 피신 길에 동행했던 총이 이 천보총이었다. 1896년 12월 우금치에서 완전 패배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피신중 전라도 순창의 피노리 주막 집에서 배신한 김경천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체포조에 의해서 포위당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이 조사를 받으러 출두하는 장면

전봉준이 타도를 외쳤던 일본인이 촬영한 것이다.]


그는 천보총 한 정을 들고 탈출하려고 담을 뛰어 넘었는데 담 아래에 잠복한 체포조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강하게 타격을 당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에 그가 가마를 타고 있는 이유다.] 전봉준의 다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다음 해 4월 무악재의 사형장에서 처형당할 때까지 걷지를 못했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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