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로 무장한 미 북군 최강여단 -2-

도끼로 무장한 미 북군 최강여단 -2-


그는 그의 보병을 승마화하면서 그 다음 단계에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기병들의 기본 화기는 기병총과 세이버[sabre]라 부르는 기병도였다. 기병도는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게 가볍게 만들어졌다. 가볍다 보니 살상력에 제한이 있어 칼을 휘두를 때 노리는 곳은 적병의 손목이었고 베기보다 찌르기를 주요 기술로 했었다.


그러나 총기가 발달하면서 기병도의 역할도 많이 축소되어서 기병도보다 권총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었다. 하지만 남북 전쟁 시대에는 여전히 기병도가 절대적인 대세였다. 기병도는 실용성에 앞서 하나의 멋과 권위의 심벌로서 전통 기병들의 버리기 힘든 장식물이기도 했다.



[남북 전쟁 때의 모델 1860 세이버]



기병 돌격을 하거나 적의 기병과 얽힐 일이 없었던 그의 승마 보병에게 기병도는 별로 필요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기병도를 채택하지 않고 놀랍게도 자루가 긴 도끼를 각 부대원들에게 지급하였다.


도끼는 기병도보다 나무를 자르고 숙영지 마련 등 병영 생활에서 쓸모도 많았었고 보병 전투의 육박전에서 기병도보다도 공포스런 파괴력의 무기이기도 하였다.


와일더의 승마 보병들이 자루가 긴 도끼를 말안장에 차고 출동하는 기이한 광경은 피아 양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와일더는 이 도끼 무장이 적에게 공포감을 주어 위축시키는 심리적  효과가 크다는 것까지도 계산에 넣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끼로 무장한 와일더 여단의 병사]


와일더의 번득이는 창의력은 다음 해 가을 또 다른 결단을 내리게 했다. 1863년 그는 스펜서 소총을 전 여단 장병의 기본 화기로 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위력이 크고 사거리가 긴 단발 소총으로 무장할 것인가 위력은 약하나 연발 사격이 가능한 연발총으로 무장할 것인가 하는 결정을 투표로서 부하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여건이 안 되면 연발총은 사비(私費)로서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도 알렸다. 결과는 압도적인 연발총의 선호였다.


그 때 보병의 기본 화기는 화력과 사거리는 좋으나 한 발 한 발 장전해서 쏴야 하는 단발총이었다. 당시 탄생한지 얼마 안 되는 연발총은 총신이 짧고 무게도 가벼워 조작하기가 아주 편리했었다. 파이프 형태의 탄창에서 방아쇠 울과 붙은 레버를 움직일 때마다 장전되어 자동 장전 발사할 수 있는 다량의 화력은 위력이 뛰어난 것이었다.


그가 염두에 두었던 연발총은 두 종류였었다. 하나는 스펜서 소총이었다. 다른 하나는 후에 유명한 명총 윈체스터 73의 원조가 되는 헨리 연발총이었다.



[헨리 연발총]


헨리가 16발의 실탄을 장진했었으나 스펜서는 7발만 장진하였다. 그는 헨리와 스펜서 소총 제조 회사에 총 값을 장병들이 스스로 담당하겠으니 충분한 수량을 보급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스펜서 연발총 –라이플 형]


헨리 연발총 회사에서는 아무 회답이 없었으나 스펜서 연발총 회사에서는 그렇게 하겠다는 회신이 왔었다.


그러나 이 스펜서 소총은 당시 군 상급자들이 보기에 전 부대에 공급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파격이었다. 이것은 마치 위력도 약하고 사거리도 짧은 권총만으로 전 부대를 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가 있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화력을 대폭 감소시켜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었다.



[스펜서 연발총의 카빈 형]


이런 고정 관념의 저항에 극복하며 집중적으로 발사되는 연발 사격의 연속 사격의 위력을 내다보고 스펜서 소총을 채택한 지휘관 와일더의 혜안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말 한대로 보수적인 군 상층이 와일더의 부대에게만 스펜서 소총을 사줄 수는 없었다. 건의해봤자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자 와일더는 독단 행동을 저질렀다. 와일더는 고향의 은행과 교섭하여 장병들이 상호 보증으로 한 정에 35불이나 하던 이 스펜서 소총을 다량으로 구입해서 전 여단 부대원을 이 총으로 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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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카빈은 조선의 신미양요 때 광성보를 공격했던 미군이 무장하고 있었고 동학군이 이 스펜서 카빈으로 추정되는 후문총[後門銃]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 메이지 시대 일본 내전에 남북 전쟁 때 쓰던 다량의 미제 무기가 도입되었는데 그 중에 스펜서 카빈이 있었다. 그 중 일부가 조선으로 유입한 듯하다.


와일더의 부대가 무장한 스펜서 총은 총신이 짧은 카빈 형으로 알려졌으나 그 때의 사진을 보면 총신이 긴 라이플 형이 대부분이었슴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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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게 된 알게 된 북군 상부는 할 수없이 중대원들이 개인 돈을 소비하기 전에 대신 그 부채를 모두 변제하여 주었다. 먼저 저지르고 해결하게 하는 와일더의 수완이 통했던 것이다.


스펜서 소총으로 무장한 와일더의 승마 보병은 1863년 후버스 갭을 급습해서 점령하고 이어서 남군이 가하는 연속적인 반격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와일더의 부대는 단 50명의 손실을 입으면서 월등하게 우세한 적 부대를 맹격하여 적 200명을 살상하고 그들의 공세를 돈좌시켰다.


이 연발총은 후에 칙카마우가 전투에서 와일더의 부대가 남군의 측면을 기습해서 대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압도적인 적의 공세 속에서 와일더의 여단이 퍼붓는 화력은 그의 여단을 한 개의 불덩어리 같은 화력 요새로 만들어 적의 공세를 돈좌시키고 조지 토마스 장군의 군단이 새 방어선을 구축하는 여유를 만들었다.



[칙카마우가 전승비]

와일더 여단은 번개같은 승마 기동과 연발 화력으로 연승을 거두자 이때에‘번개 여단’또는 무장한 도끼 때문에 ‘도끼 여단’의 별명이 자연적으로 생겼다. 


1864년 여름 번개 여단은 아틀란타 전역에 참여해서 다수의 승리를 하였다. 이 아틀란타 전역의 승리 공로는 와일더는 1864년 8월 7일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전 이래 감염된 이질에 2년 간이나 시달리다가 장 티프스까지 걸려서 신체가 극심하게 쇠약해졌다. 더 이상 군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던.와일더는 1864년 퇴역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1865년 4월 12일 남군의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전후 와일더는 테네시 주의 록 우드로 이주하여 철도 레일을 만드는 철강 사업등 여러 사업을 벌여 모두 성공시켰다. 미국 남부에 최초로 두 기의 용광로를 세운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와일더는 사업의 연고로서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와도 교유했었다.



[와일더가 세운 Cloudland 호텔]


철로 사업에 성공했었던 와일더는 존슨 시에 166객실의 호텔을 열어 이를 지방 명소로 만들었다. 와일더는 정계에도 진출하여 차타누가 시의 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시장을 지냈다.


그는 1917년 플로리다 주로 겨울 휴가 여행를 떠났다가 잭슨빌에서 87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17 / Comments 2

  • 류지현 2016.02.18 09:28

    1964년 8월7일 준장으로 승진 - 1864년인것 같구요
    1895년 4월12일 남군의 항복 - 1865년인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s://mnd9090.tistory.com 동고동락 2016.02.25 13:26 신고

      오~ 오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부분 확인하고, 수정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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