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독립의 굳건한 의지를 선언하다, 대일선전포고 74주년

자주독립의 굳건한 의지를 선언하다, 

대일선전포고 74주년


▲ 1940년 9월 열린 한국 광복군총사령부 창설 기념행사 (사진 출처 : 국방일보)


1945년 8월 연합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된 후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천신만고로 수년 간 애를 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이 모두 헛일이 되었다”며 탄식한 것입니다. 한국 광복군은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국내 진입을 목표로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끝나 광복군은 우리 땅에서 싸워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1941년 12월 10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날입니다. 오늘은 대일선전포고 74주년을 맞아 대일선전포고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의 모습 (사진 출처 : 국방일보_독립기념관 제공)


민족 최초의 자주적 군대, 한국 광복군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는 항저우, 창사, 충칭 등으로 본거지를 옮겨 가면서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꾸준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이뤄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상하이 파견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을 제거하고 요인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큰 성과를 거두며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웠습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주석이었던 장제스는 윤 의사에게 감동받아 김구 선생을 만나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임시정부는 군관학교와 한인무관양성소를 통해 군인 양성에 힘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0년 임시정부는 훈련을 마친 군관들을 집결시켜 ‘한국 광복군’을 조직합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이었던 자주적 군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듬해인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국제 사회에 처음으로 한국 광복군의 이름을 알린 것입니다. 

대일선전포고 후 한국 광복군은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해 일제와 싸웠습니다. 미얀마와 인도 전선에서는 영국군과 함께 연합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일본군에 사로잡힌 영국군 수백 명을 구출하는 등의 전과를 올려 영국군 사령관에게 치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직접적인 전투 참여는 물론 일본인 포로 심문과 선전 활동 등 심리전에도 참여해 일제 압박에 일조했습니다. 


▲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과 미국 OSS 대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국방일보_독립기념관 제공)


무위로 그친 한반도 진공 작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지만 우리나라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직접적인 결전이  불가피했습니다. 이에 1944년 임시정부는 미국과의 군사합의를 통해 ‘국내정진작전’을 수립했습니다. ‘독수리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공동으로 추진, 한국 광복군 특공대가 한반도에 잠입해 대대적인 유격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1945년 9월에 작전 실행을 목표로 OSS로부터 수개월 간 특수 훈련을 받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세우고 미국에서는 낙하산을 타고 국내에 잠입할 선발대의 훈련도 실시되었습니다. 특공대로 뽑힌 대원들은 결전의 날을 기다리며 고된 훈련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작전 실행을 몇 주 남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국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에 따른 ‘전후 처리’의 일부분으로 이뤄지게 되었으며, 승전국 간의 세력다툼에 휘말려 한반도가 지금처럼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국내 진공 명령을 기다렸던 김우전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허탈한 심정에 멍하니 허공만 쳐다봤다”며 “70년이 지나도 그때 실망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는 한국광복군선언문비 (사진 출처 : 국방일보)


만약 독수리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힘으로 국권을 되찾고 승전국의 대접을 받아 당당하게 국제 사회에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 세력에 의해 국토가 강제로 분단되는 일도, 6·25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사건도 겪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일선전포고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 끝까지 항거했다는 점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나라의 존재를 알린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세계 각국에 드러냄으로서 조국의 광복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대일선전포고는 자주적 독립을 향한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광복군과 대일선전포고, 국내진공작전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대일선전포고를 통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독립 의지를 알렸습니다. 74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기념하고 되새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앞두고 요즘 분위기가 한껏 들떠 있습니다. 74주년 대일선전포고일을 맞아 오늘의 평화를 있게 해 준 순국선열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잠시 갖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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