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 성갑 씨의 회고 -11-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 삼수 경위 세번째 이야기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 성갑 씨의 회고  -11-  



사찰 유격대의 쇠퇴기​ 

사찰 유격대장 강삼수 경위는 1953년 4월 산청군 삼장면 삼장 지서장으로 명받았다. 자잘한 행정업무를 싫어했었고 별 다른 경험도 없었던 그는 행정에 능한 김을로 씨에게 차석 직을 맡아 주도록 설득하여서 두 사람이 같이 부임했었다. 두 부부는 지서 인근 한 집을 얻어서 같이 생활했다.​

[​강성갑씨는 이 사진이 삼장지서에서 찍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비들에게 자주 습격을 받았던 삼장 지서 돌담에 뚫린 총구가 인상적이다.]



공비 창궐 지역인 산청군은 휴전 후에도 공비들이 자주 나타났었다. 치안 행정 업무를 보면서도 그는 공비 토벌에 자주 출동했었다. 그가 삼장면 지서장 시절인 1954년 1월 공비 1명을 귀순시킨 공으로 군[軍]으로 부터 표창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잔존 공비 중에서 최고 거물인 노영호를 사살함에 크게 기여하여 서전사[서남지구 전투 사령부] 사령관 신상묵씨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노영호는 서울 공대 출신 인텔리 공비로서 남부군 군사책임자 이영회가 사살된 후 그의 직을 승계했던 인물이다. 최후의 공비며 여공비였던 정순덕과 이홍희가 따라 다니던 마지막 공비 부대의 두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지서장 할 때는 이미 남한의 공비들은 급속하게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군과 경찰의 토벌도 엄혹했지만 공비들은 주민들의 버림을 받은 것이 그들의 종말을 재촉했다. 


주민들의 지원은 공산 게릴라들에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6.25의 남침으로 공산 주의자들의 만행을 직접 겪었었고 공비들조차 주는 것은 없이 약탈만 해가고 사람들이나 죽이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정내미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도움이 되지 못했었다.공비들은 연명을 위한 식량 도둑질에 올인하는 여러 작은 무리로 분산 된 도둑떼로 전락하였다.


​공비들에게 죽음의 마왕같은 존재였던 강삼수 경위의 그 가치가 급감되어 가는 상황이 찾아오고 있었다. 강삼수 경위는 삼장 지서장으로 발령이 난 다음 무려 8년간 말뚝 지서장들만 했다가 경찰을 떠났다.​ 아무리 그가 행정에 능하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었다해도 강경위는 본서인 산청 경찰서에는 한 번도 근무해보지 못했다.


이제 별 소용이 없으니 변두리 구석에서 주는 밥이나 먹고 조용히 있으라는 서러운 푸대접 인사라고 오해할 만 하기도 하다.​


​한편 강경위가 떠나고 나서 최 모 경사라는 어린 대장이 산청 경찰서 사찰 유격대장으로 부임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대원들보다 나이가 어려서 대원 장악도 잘 되지 않았었다.그의 부임이래 공비들이 나타나서 사찰 유격대가 몇 번 출동했지만 한 번도 전과를 올리지 못 했었다. 지도자의 역량이 어떻게 부대의 능력을 나타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강경위의 이임과 함께 전국 경찰들이 알아주던 산청 경찰서 사찰 유격대의 명성도 시들해졌다. 강성갑씨는 이후 사찰 유격대를 떠나서 남원의 서남지구 전투 사령부[서전사]로 전출을 가서 사찰 유격대와 작별을 하였다.


​강성갑씨는 산청경찰서 사찰 유격대가 언제 해체되었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도 못했다.​

 강삼수 경위 퇴직 전의 사진



​퇴직 후

강경위는 1953년 4월에 삼장지서장으로 임명되어서 56년 10월까지 근무하다가 다른 지서로 전근을 갔다. 그 후 다시 삼장 지서로 돌아와  재임하다가 경찰을 떠났다. 강성갑씨는 강경위가 경찰을 떠날 때 삼장면 지서장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61년 경찰을 떠난 강경위는 일년여를 쉬다가 조개골의 산을 사들여서 산판을 하였다. 공비들이 사라진 조개골의 깊숙한 곳에는 좋은 목재감이 되는 나무들이 무성하였다. 강경위는 산판을 차리면서 성실한 강성갑씨를 불러 당시 서기(書記)라고 불리던 경리 업무를 맡겼었다. 


​강성갑씨는 1957년 경찰을 떠났었다. 사회에 나가 사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못해 고생을 하던 중에 고맙게 강경위의 청을 받아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황계 부락에 사무실도 열었는데 그때 나무 장사는 가격이 좋아서 트럭 한 차를 팔면 논 서너 마지기의 논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호방한 강경위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다 써버려서 제대로 저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5.16 후 군사 정부가 엄격한 삼림녹화 정책이 실시하고 나무 벌채가 금지되었다. 강경위는 할 수없이 나무 장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찾아 온 것은 지독한 빈곤이었다. 강경위는 끝내 새 직업을 얻거나 사업을 하여서 집안 경제를 꾸려내는 기회를 끝내 잡지를 못했다.​ 정부나 경찰이나 사회는 더 이상 그 효용 가치가 없는 이 전쟁 영웅의 어려움을 외면하였다. 강경위 정도의 전공이면 정부 기관에 취업 정도야 알선해줄 수가 있었을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


​돈 버는 일에 별 주변없는 그를 대신해서 부인 이종이 여사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으나 가난을 벗어나지를 못했었다.그 혹독한 가난은 귀하게 낳아 기르던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자녀들은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모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삶과 싸우며 살아갔다.


​강삼수 경위 후년



​세상과의 이별


​전투보다 몇 배 더 힘든 가난의 삶을 허덕이며 살아가던 이 불세출의 전쟁 영웅은 십 년 남짓한 삶과의 투쟁을 끝내 배겨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72 년 10월 어느 날, 경남 진주 봉곡동 로타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그는 유조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멀리 나가 떨어져 정신을 잃은 그는 진주 시내 김윤양 의원에 입원했다. 가슴을 세게 부딪힌 사고에서 그의 폐와 심장은 크게 손상되었다. 의식은 있었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강성갑씨가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가보았더니 그를 알아보고 겨우 손을 움직여서 인사만 하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지리산 밀림의 공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건 죽음의 사신처럼 스며들어 불의의 일격을 가하던 게릴라 토벌의 귀신이 백주 대낮에 ​대형 트럭과 충돌했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 사실이다. 경찰 퇴직 후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천부적인 전투 감각이 모두 소진된 것 같아 허망한 죽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강경위는 달포를 그런 위독한 상태를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례식을 거쳐 진주의 한 납골당에서 안치되었다. 혼자 남은 이종이 여사는 30년 가깝게 자식들과 손녀까지 길러내며 힘들게 살다가 2008년 남편 곁으로 갔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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