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명 충돌사 [ 4 ]

동서문명 충돌사 [ 4 ]

 

가톨릭유럽을 수호하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

* : 사라센 ()

* : 프랑크 ()

 

7세기에 발흥하여 극성기에 동쪽으로는 인도 서부까지, 서쪽으로는 유럽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무대로 흥성했던 사라센이라 불리는 이슬람 왕조들이 있었다. 사라센은 국호가 아니고 서양 시각에서 중세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인도 서부에 이르는 지역에 존재한 이슬람제국들을 통칭하는 단어다. 이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당시 유럽에서는 세계를 기독교를 믿는 지역과 이슬람을 믿는 곳으로 나누어 동과 서를 구분하였다.

 


[ 사라센은 중세 시대에 중동, 북아프리카, 스페인 지역을 장악한 당대 슈퍼 파워였다 ]

 

똑같은 유일신을 섬기지만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 이 두 세력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피레네 산맥 남쪽을 차지한 이슬람세력은 에스파냐 총독 압둘 라흐만의 지휘로 산맥을 넘어 유럽의 한가운데로 진격했다. 로마 멸망 후 돌아가며 명멸을 계속하던 여러 게르만계 왕국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낸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의 서진을 막는 데 나서게 되었다.

 


[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으로 향하던 사라센을 프랑크 왕국이 막게 되었다 ]

 

프랑크는 이슬람세력을 투르(Tours)와 푸아티에(Poitier) 사이에서 격파하여 이베리아반도로 다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유럽역사에서 이 전투는 가톨릭세계를 이슬람의 공격에서 구출한 것으로 중시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위기를 잠시 모면한 것뿐이지 여전히 중세 유럽은 이슬람 세계의 위협에 놓여 있어서 역사학자들은 중세 초기의 유럽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 유럽에서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기독교 세계를 구한 사건으로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

 

이슬람세력이 서유럽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것은 1492년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왕조)가 정복된 후의 일이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정복이후 오랜 세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동유럽은 보스니아나 아제르바이잔처럼 아직도 건재하다. 만일 이 전투에서 사라센이 승리했다면 오늘날의 유럽은 이슬람세계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가들도 있을 정도로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기독교 세계의 기념비적 전투라 할 수 있다.

 

 

세계사에 등장한 코리언 (751년 탈라스 전투)

 

* : ()

* : 사라센

 

처음에도 언급하였지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지도에 국경을 표시하듯 정확히 나눌 수는 없다. 그래서 중앙아시아나 팔레스타인 같은 중간지대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때로는 동양사로, 경우에 따라서는 서양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는 사라센이 동양 문명의 선봉장으로 등장했지만 이번서는 극동의 서진으로부터 서양 문명을 방어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 탄구령을 넘어 서진하던 당나라와 동진하던 사라센의 충돌이 벌어졌다 ]

 

동쪽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8세기 들어 서쪽으로 눈을 돌려 747년 공략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때 원정군을 이끈 이는 고구려 유민 2세인 고선지(高仙芝)였다. 그의 원정 중 백미는 문명 세계를 가르던 해발 4,600여 미터의 탄구령을 넘어간 것이었다. 20세기 초 이곳을 등반한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Marc Aurel Stein)은 저서에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을 능가한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놀라운 업적이었다.

 


[ 중국 드라마에서 묘사한 고선지 ]

 

이를 발판으로 고선지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 세 길을 모두 장악하자 위기를 느낀 토번(티베트)은 사라센의 맹주인 호라산과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고선지는 호라산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어,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카자흐스탄 탈라스 평원에서 5일간의 대혈투를 벌이게 된다. 바로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것으로 기록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 동서양의 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하였던 탈라스 강 ]

 

고선지는 돌궐족의 반란으로 이 전투에서 처음 패배를 당하였다. 주로 보병이었던 45천 당나라군은 기병을 전방에 내세운 호라산군에게 허를 찔렸다. 살아남은 자가 불과 2,000여 명에 불과한 대패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서역이 이슬람 문화권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 전투를 통해 유럽까지 전해지게 된 제지술은 이후 차근차근 르네상스를 준비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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