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10-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세번 째 이야기 ]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10-

 [​1952년 추석 촬영. 왼쪽의 부부가 강삼수 경위와 부인 이종이 여사. 오른쪽이 화계리 주둔소장 박문선 경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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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40년 넘게 보관하면서 ​제일 궁금하게 생각했었던 강경위 옆의 부부에 대해 부하 강성갑씨가 정확히 알려주었다. 유격대가 금서면 화계리 주둔소를 거점으로 삼고 있을 때 촬영했다고 한다. 왼쪽의 부부가 강삼수 경위와 부인 이종이 여사. 오른쪽이 화계리 주둔소장 박문선 경사 부부이다. 이 무렵 강삼수 경위는 전투모가 아닌 철모 화이버를 즐겨 썼었다.

박문선 경사의 오른쪽 가슴에 부착한 뒤집은 갈매기 세 개의 계급장은 경사 계급장이라고 한다. 순경 신참은 뒤집은 갈매기 하나,고참은 갈매기 두 개였었다. 경위는 무궁화 하나. 강경위의 오른쪽 가슴에 거의 가려진 무궁화 계급장이 보인다. 경찰 갈매기 계급장은 전쟁이 끝난 53년에 현재의 무궁화 잎사귀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강성갑씨는 박문선 경사가 매우 성실한 간부였으며 그 부인도 무척 착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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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복 


강삼수 경위는 '전투의 핵심'을 알았었다. 그는 정규전에서 보병들이 하듯 정면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투는 거의 하지를 않았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가 지휘하던 사찰 유격대가 3년 넘는 세월 무수한 전투를 겪으면서도 전사자가 없었던 믿지 못할 전과[산청서 김두수 사찰계장이 지휘했었던 전투에서 전사한 권영도 순경 제외]는 그가 항상 매복이나 기습으로만 공비들을 치는 영리한 전투를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한의 공비들은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달짝지근한 말에 솔깃하여 공비의 길에 들어섰지만 꿈은 사라지고 종말에는 살아남기 위한 식량을 구하는 좀도둑 떼로 전락하여 최후를 맞았었다.

 

​공비들은 식량 확보를 위한 보급 투쟁[補鬪-공비들의 식량 강도질]에 나설 때마다 군경의 매복에 전전긍긍하여야 했다. 그 정도로 경찰의 매복 공격이 정확했었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강성갑 씨는 강경위의 사찰 유격대가 거둔 승리의 거의 대부분 매복에서 거둔 승리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게릴라 토벌 전술에서 절대 참조해야 할 중요한 전투의 교훈이다.]  

매복 전술이야말로 한국의 전투 경찰이 개발한 공비 토벌의 병법이었다. 남한 공비들의 최고 사령관 이현상도 매복 공격으로 제거했고 공비들의 제2인자였으며 공들의 군사부문 총책임자였던 이영회도 매복 공격으로 죽였다.


영화 ‘남부군’에서도 연출되었던 호남의 악질 공비 왜가리[또는 와가리]도 매복에 의해서 토벌되었다. 경찰의 토벌을 13년간이나 피해 다니던 최후의 공비 정순덕, 이홍희의 범죄행각도 경찰의 매복에 의해 종말을 맺게 하였다. 매복은 미리 공비 이동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실행해서 성공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공비들이 민가에 내려와 식량털이를 하고 도망칠 때 예상 통과 지점을 미리 예측하고 달려가서 매복하여 얻은 전과들이었다. 


​만약에 넓은 벌판같은 곳이라서 매복 지점의 정확한 설정이 어렵거나 여러 곳이 공비 통과 가능 유력 지점으로 판단되면 유격대를 두 세 개 팀으로 분산해서 복수의 지점에 매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성갑씨는 무거운 식량을 욕심껏 훔쳐 등에 진 공비들의 도피 속도가 느려서 마을이 털렸다는 신고를 받고도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 미리 앞질러 매복할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공비들은 의외로 전투의 기본에 서툴러서 도피시 첨병을 앞세우는 경우도 드물고 정숙 보행 같은 수칙도 제대로 지키는 부대도 없어 유격대는 매복 지점 백여 미터 전방에서부터 어둠 속에 들려오는 공비들의 수런수런한 발자국 소리로서 ​공비들의 출현을 알 수가 있었다. 유격대는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가 매복 지점 앞을 통과하는 적을 일제 사격으로 섬멸하곤 했었다.​


​대개 공비들이 식량을 무거운 식량을 운반하고 아지트로 이동할 때면 빠른 길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어 노련한 유격대원도 공비들의 도주로를 대강은 예상할 수가 있었다고 하니 매복의 기초적인 노하우는 한국 전투 경찰들에게 모두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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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지역에서 공비 소탕을 했던 김 두운 총경은 그의 자서전에서 보통 사람은 도보로 한 시간에 약 6km로 갈 수 있었던 반면 무거운 식량을 짊어진 공비들은 약 3km의 속도로 걸을 수가 있다고 한다. 김두운 총경은 식량 약탈의 보고를 받으면 즉시 지도에 식량을 털린 부락과 공비들의 추정 아지트를 직선으로 이어보고 이 직선에 가장 근접한 예상 통로[루트]를 선정한 뒤 이 루트에서 반드시 통과하여야 할 산 고개나 교차되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으면 대개는 공비들이 나타난다고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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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위는 통과 지점을 판단하여 이 도주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했었다. 다시 말하면 목을 잡는 강경위의 감각은 동물적인 본능의 수준이었다.그가 여기로 올 것이다 하고 찍고서 매복하면 틀림없이 곧 무거운 짐을 진 공비들이 헐떡거리며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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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목 잡는 감각은 타고 났다는 사실은 현재 산청군 생비량면 초등힉교에서 근무하는 아들 강종상씨가 산청군에서 알아주는 멧돼지 사냥꾼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강종상 씨는 멧돼지 사냥을 나가서 잡은 목으로 멧돼지가 다섯 마리나 나타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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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가 수색이나 출동이 없는 날에는 자체 교육을 했는데 제식 훈련이나 각개 전투 등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당장 써먹을 수가 있는 매복의 기술이나 발자국 추적의 토론과 연구가 주요 내용이었다.

토론식으로 이런 매복 기술을 연마해가니 대원들의 목 잡는 기술도 대폭 발달하였다. 특히 강경위의 고향이기도 하였고 대원들이 자주 출동을 해서 그 지형을 완전 숙달하고 있던 금서면에 나타난 공비들은 모두 매복에 뒷덜미를 잡혀 토벌 당했었다.

​국군에서 이 매복 기술은 교리화해서 매뉴얼을 만들고 군을 훈련했더라면 분명 간첩들의 남파가 극성을 부렸던 6-70년대에 토벌에 큰 도움이 있었을텐테 공비 소멸과 함께 이 매복 기술도 증발해버린 듯하다.


​과거 남아연방 특수부대에서 흑인 원주민[주로 부쉬맨]들의 발자국 추격 기술을 정리한 야전 교범을 보았었는데 우리 군경이 이런 기술을 계속 개발하기는커녕 사멸시켜 버린 것이 아쉽다. 강성갑씨도 자신들이 실수와 성공을 되풀이 하며 힘들게 개발했던 매복 기술이 후배들이 그렇게 잊어버린 것이 무척 아깝다는 소감을 나타냈다

[​산청 경찰서 전우들. 오른 쪽은 사찰 유격대장 시절 부하대원 강성갑씨. 

왼쪽은 삼장지서장 시절 차석 김을로씨. 2013년 강삼수 경위 부부의 대전 현충원 이장 때 촬영]



3. 추격 


강경위의 천재적인 주요 전투 기술의 하나로 적을 추격하고 발견하고 기습하는 기술이 있었다. ​유격대가 공비 출현의 신고를 받고 매복의 장소로 직행하기 전에 피해를 입은 마을로 직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공비가 다녀간지 몇 십 분이 안되면 매복대신 즉시 추격하는 수도 있었다. 


야간인 경우가 태반이지만 강경위는 밤눈으로도 이들이 간 경로를 더듬어 풀이 누었거나 밤이슬이 흩어진 흔적을 쫓아가 공비들을 발견했었다. 공비들은 무거운 식량을 지고 힘들게 운반하느라 주변에 신경을 제대로 쓸 형편이 아니고 또 앞서 말한대로 후위를 지정할 정도로 군사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바짝 따라 붙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걷기만 했었다.


​강성갑씨는 유격대가 공비들의 뒤에 붙어 불과 몇 십 미터의 후방에서 수십분간 같이 따라간 일도 있었다고 말한다. ​노련한 강삼수 경위는 이런 때 총격을 가하면 죽는 공비보다 도망치는 공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대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미행만 하게 했었다.


무거운 짐을 진 공비는 얼마 가지 못해서 휴식을 취했었다. 바로 이 때가 강경위가 노리는 순간이었다.미행하던 향도가 신호를 하면 약간 뒤에서 따라오던 본대가 조용히 공격 대형으로 전개했다. 공비들은 대부분 산개해서 경계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모여 담배를 피웠다. 그런 인원 밀집 장소에 강경위의 수류탄이 먼저 날아가고 대원들의 수류탄 7,8발이 따라 날아가 폭발하면 공비들은 모두 도망치지도 못하고 몰살을 하였다.


​사찰 유격대가 이렇게 추격을 해서 공비들을 섬멸한 경우가 세 번 있었다고 한다. 모두 빠르게 현장에 달려갈 수가 있었던 경우에만 가능했던 경우였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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