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9-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세번째 이야기]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9-


강삼수 경위의 대전공 비결​

불과 10여명의 부하를 지휘해서 적과의 교전 62회, 적 사살 322명의 대전공은 강삼수 경위가 수여 받은 40여 차례의 상장과 경남 도경(道警)의 상훈 기록부가 증명해준다.이런 개인의 대전공 기록은 6.25 때 싸운 한국 육군과 해군, 그리고 공군과 해병대등에게서 발견하기가 힘들다. 

[강삼수 경위가 받은 각종 상장들의 일부 [군의 훈장에 해당]]


나는 강성갑씨에게 과연 이 강삼수 경위의 대기록이 신빙성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 저는 대장님과 1년 반 정도 같이 싸웠지만 20 회 가까운 전투를 했었고 거의 이겼었습니다. 대장님은 48년도에 경찰에 들어와서 10년간을 전투로 일관했습니다. 62회 교전 정도야 충분히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계산해보았다. 강경위는 48년도에 경찰에 들어와서 비정규직 경찰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시절의 전투 경력을 인정받아 소부대를 거느리고 전투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린 사실이 그의 선배 백 남현 경위의 글에 나타난다. ​[지리산에 가까운 산청군에는 공비들이 47년도부터 발호하기 시작하였다]

​[마가렛 히긴스 기자가 1951년 봄에 촬영한 전투 경찰들의 오침 시간.

보니 아직도 99식 소총이 있다. 무기마저 보급이 신통치 않았던 전투 경찰들은 주민들의 성금으로 M1 총 한 정에 쌀 세 섬, LMG 한 정에 쌀 열 섬, 3.5 로케트 포는 쌀 30섬씩 주고 구입해서 싸웠다]


강경위는 6.25 전쟁이 나자마자 함안 전투를 포함해서 북한군과 전투를 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었다. 수복 후 1950년 9월[정식으로는 순경 임관한1951년 2월]부터 사찰 유격대를 지휘하여 53년 초까지 공비 토벌의 일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취약지 삼장면의 지서장으로 임명되어 공비들이 완전 섬멸될 때까지 수년간을 면내 출현 공비 토벌 작전에 임했었다. 


​그가 삼장면 지서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차석으로 같이 임명 된 김 을로 총장의 말을 들어보면 53년 초 부임했을 때 삼장 지서의 전투 병력인 지서원들과 의용경찰[비정규직- 특공대]들의 총 합계가 백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적정[敵情]이 이 곳에서 수년간 더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강경위가 십여년의 세월을 적과의 전투를 했으니 이런 62회 교전의 기록은 달성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가 목숨을 잃지 않고 또 한 명의 부하 손실[김두수 산청서 사찰계장이 지휘한 전투에서 전사한 권영도 순경 제외]도 없이 이런 대 기록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은 그가 겪은 전투가 포병 화력을 동원한 정면 격돌의 고강도 대규모 전투가 아니라 주로 소총만을 가진 소부대의 공비들과 전투를 했었기 때문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렇다고 해도 공비 출몰 지역에서 싸운 각 경찰서의 사찰 유격대들이 한 둘이 아닐텐데 이런 대기록을 세운 강삼수 경위의 전승 기록에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강삼수 경위에 관한 첫 번 째 글에서 이 점에 대해서 알려진 기존 기록들만 가지고 분석해보았었다.강성갑씨와의 대화라는 절호의 기회를 통해서 이 방면으로 좀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보았다.결과 첫 번 째 글에서 밝힌 나의 분석들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었다는 사실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히긴스 기자가 촬영한 여자 공비들 

강성갑씨와의 인터뷰에서 여자 공비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타나서 당황했었다.여자 공비들 중에 남자들을 뛰어넘는 잔인한 학살을 해댄 인간들이 있었다. 히긴스 기자는 위 사진 중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여자 공비들이 있다고 말했다.​


1. 먼저 강경위의 타고난 대담함과 용감함이 있었다.그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열배 이상 되는 대병력의 공비들을 공격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었고 때로는 경계가 삼엄한 적의 심장부에 홀로 뛰어들어 기습하는 상상 밖의 대담한 전투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강경위가 일본군으로서 미얀마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실전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단련 된 ‘전투 감각’이 더욱 대전공의 밑천이 되었다고 본다..강경위의 전투 경험은 전투에 임해서 비수같이 적의 핵심을 찌르는  전투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하였던 것이다.


전투 감각은 소위 말하는 군사적 직관으로서 소수의 명 전투 지휘관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천부의 소질이기도 하다.이런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은  나폴레옹이 매 번의 전투에서 거두었던 상승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명장의 재능이 시골 경찰의 말단 지휘관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믿어지지가 않는 사실이다.


[강성갑씨가 받은 참전 유공자 증서]


2. 강경위는 전투 승리의 필수 원칙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이 원칙에 놀랄만큼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했었다. 즉 그것은 ‘정보’였었다. 정보는 공비들을 기습하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전투 자산이었다. 강경위는 공비의 소재, 그들의 움직임을 치밀한 정보 활동으로 미리 알아내고 기습하거나 매복 공격을 가했다.


​강경위가 자기의 고향이며 친척들과 동창 친구들의 인맥이 풍부한 고향 금서면 화계리의 주둔소를 유격대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기습 성공으로 연결되는 다수의 정보를 수집하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주시해주었다.대원들 역시 모두 산청군 출신들인지라 주변에 정보 인맥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정보 인맥들을 통해서 공비들의 동향 정보가 흘러 들어왔었다.더구나 산청 경찰서 본서 사찰계에서 공급하는 정보 역시 작전에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강성갑씨는 강경위가 중요한 정보를 공급해주는 자기만의 정보 비선[秘線]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지만 알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금서면 출신 공비들을 생포하면 귀순 처리하여서 방면해버렸다던가, 또는 생포 공비의 보급선을 따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인정 많은 성격의 탓도 있었으나 좌익 성향의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해서 정보 라인을 두껍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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