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8-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 삼수 경위 세번째 이야기]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8-


권영도 순경​[1926~1952]



[권영도 순경[후에 경위 추서]]


권영도 순경은 강삼수 경위가 지휘하던 사찰 유격대에서 유일하게 전사한 대원이었다.그는 전사 후에 크게 각광을 받아 전투 경찰의 아이콘으로 존경 받고 있다. 


2001 년에 전쟁 기념관에서 이달의 호국인물로 추모되기도 하였고 현재 산청군의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는 그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지금까지 그의 영웅적인 전사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없었다. 단지 그가 5명의 특공대와 함께 지리산 웅석봉 전투에서 공비 요새를 파괴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다소 윤색된 기록만 전해 올 뿐이었다.

산청군 사찰 유격대원 강성갑씨는 권영도 순경이 전사한 전투에 참가했었던 유격대의 유일한 생존 인물이다. 그는 권영도 순경 전사의 목격담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말하는 권영도 순경의 전사를 아래에 소개한다. 


1952년 7월13일, 산청읍 부근 울리 야산에서 80여명의 공비들이 출현했다. 산청 경찰서 사찰계장 김두수씨가 지휘하여 산청 경찰의 사찰 유격대는 물론 직원들, 특공대까지 포함한 50명 정도가 출동하여 추격에 나섰다. 


여기서 특기할 사실이 하나 있다. 산청 경찰서의 사찰 부서가 사찰과인지 사찰계인지 무척 혼란스러워 필자는 일단 사찰과로 추정했었다. 강성갑씨는 규모가 큰 갑지 [甲地]의 경찰서 사찰 부서는 사챁과라 불렸으나 상대적으로 작은 을지[乙地]의 경찰서 사찰 부서는 사찰계였다고 말해주었다. 산청 경찰서는 을지였었기 때문에 산청 경찰서 사찰 부서는 사찰계라는 명칭이 맞다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강삼수 경위 유품]


공격 부대는 산으로 전개해서 올라갔는데 고지의 공비들이 경찰대를 먼저 발견하고 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한참의 총격전이 있은 후에 경찰대는 일단 철수하였다. 공비들의 저항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었다.


유격대가 철수한 뒤에 인원 점검을 해보니 권영도가 없었다. 다음 날 전병력을 투입해서 다시 수색해보니 권영도 순경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전사해 있었다. 때는 여름이라 벌써 그의 상처 부위에 구더기가 슬고 있었다.


그의 사체는 산 아래로 운구해 내와 다음 날 산청 초등학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강성갑씨는 아직도 장례식장의 써있던 고[故]경사 권영도라고 쓴 글귀를 기억하고 있다. 

권영도씨는 고향 금서면 사무소에서 면직원으로 근무하다가 경찰에 들어왔었다. 전 회에서 소개한 금서면 쌍효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9.28 수복 후에 창설된 산청군 사찰 유격대의 창설 멤버였었다. 행정을 담당하는 부관이 없던 강삼수 유격대에서 필체가 좋고 한문도 많이 아는 그가 서기(書記-총무)를 맡아 행정 업무를 맡아 했었다.


그는 전투 경찰에 경찰 후보생[의용경찰-특공대]으로 합류한 뒤에 근무하다가 정식으로 순경 시험을 보았는데 불합격하였다. 대원들은 좀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권영도가 못 생겨서 불합격했다고 놀려댔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다음 시험에 또 응시하였다.


그래도 또 불합격을 하자 강삼수 경위가 화계리 주둔소에서 직접 산청 본서의 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유격대에 절대 필요한 성실 대원이라고 주장하며 선처를 부탁해서 합격으로 처리가 되고 소정의 교육을 받고 순경으로 임용되었다.비록 나이도 많고 유격대의 고참이었지만 이런 사유로 권영도의 경찰 임관은 강성갑씨와 동기였다.


[서울이 수복된 뒤에 서울로 돌아가는 경찰들- 창졸 간에 서울을 떠난 그들은 남겨놓고 온 가족들에 관한 근심으로 귀향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경찰 합류 전에 이미 공무원 세계를 경험한 그는 경찰에서 입신하고자 하는 야심을 자주 말했었다.그 날 전투에서 전사하자 일부 대원들은 승진을 노리던 그가 출동했던 사찰계장 김두수의 시선을 의식하고 너무 과감한 전투를 하다가 적에게 노출되어 전사하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를 수근 댔으나 강성갑씨는 다소 성질이 급한 권영도 순경이 처음 겪은 대규모 총격전에서 격분하여 접근 사격을 하다가 전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아주 용감한 대원이었다. 전투 경찰사를 조사해보면 강삼수 경위가 적진에 돌격할 때는 항상 권영직 순경과 정상수 대원을 동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성갑씨에 권영직이라는 대원이 사찰 유격대에 있었나하고 물어보니 그것은 –도[道]와 –덕 [悳]자를 구별 못했던 기록자의 잘못이며 권영도 [權永道]가 맞다고 한다. 


정상수 대원은 유격대의 최연장자였으며 유격대 창설요원으로서 역시 용감한 대원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학력이 전무해서 정식 경찰이 되지는 못했었다.

전사한 권영도 순경에게는 처자식이 있었고 늙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다. 아까운 죽음이었다. 


---------------------------------------------------------------------------권영도 순경에게 유복자가 있었는데 2003년 권영도 순경을 ‘이달의 추모 인물’로 선정한 전쟁 기념관에 추도식에 그가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를 만나본 참전 경우회 김을로 총장은 아들이 마산에 거주하고 있었고 키가 휜칠한 미남으로서 잘 성장했던 것으로 보였고 그런 아들을 보면 저 세상의 권영도 순경이 상당히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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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도 순경은 전사 후에 경사로서 추서되었고 장례식 이후 유해는 고향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가 현재는 대전 현충원의 경찰 묘역에서 안장되어 있다. 


강성갑씨로서 연유는 알 수가 없었으나 그 후 세월이 지나고 경남도경과 산청 경찰서와 협의 아래 권영도 순경은 추서되었던 경사에서 경위로 다시 일계급 특진이 되고 추모되었다.


산청 경찰서의 사찰 유격대의 전공이 혁혁했었으나 이미 해체되고 대원들도 모두 경찰을 떠난 마당에 누구 하나를 찍어 전쟁 영웅으로 하느니 유일하게 전사한 권영도 순경을 혁혁한 전공의 산청 경찰서 유격대 상징으로서 추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성갑씨의 추측이었지만 산청경찰서 유격대원으로서 전사한 전우가 추모되는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강삼수 경위도 진짜로 추모될 호국의 인물인데 그에 대해서는 지난 긴 세월 경찰이나 국가에서 깡그리 잊혀진 것은 진실로 유감스럽다고 한숨을 쉰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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