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4-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세번 째 이야기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4-



국군들도 가져보지 못한 유격대의 장비​- 수갑

국군과 비교하면 모든 장비가 열악했으나 사찰 유격대는 군대가 가지지 못한 특수한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경찰들에게 지급된 수갑이었다. 공비를 생포하면 손을 뒤로 돌리고 수갑을 채워서 끌고 호송해왔다. 공비들은 잡히면 욕설을 퍼부으며 극악하게 저항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항복하면 순순히 결박이나 호송에 순응한 북한군 포로와 아주 다른 행태를 보였다.

​공비들은 [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나] 경찰을 잡으면 잔인하게 학살했었다. 이런 악행 외에 전투 경찰 중에도 공비들에게 학살된 가족들이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었다. 이런 배경으로 경찰들의 공비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안 좋은 상황이었다. 공비들이 체포되면 포로 수용 시설이나 식량조차도 없던 경찰들로서 포로들은 처치 곤란한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부상 포로들은 데리고 가봐야 치료해줄 의료 시설이나 약품도 없었다.

​상부에서 이런 상황으로 부상 공비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었고 현지 처리를 은근히 종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다 보니 즉결 처분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공비들중에 잡히면 이래저래 죽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죽을 바에야'하고 최후 발악을 해대는 것이었다. ​

​발악을 해대면 대개는 즉결 처분을 했었지만 죽일 수가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발악하는 포승 줄을 이용한 포박이 극히 어려웠었고 포박이 없으면 야간 연행이 힘들었으나 수갑들은 극악 난동 공비들을 빠르게 제압시키기에 큰 도움이 되었었다. 수갑은 전원이 가지고 휴대했던 것이 아니고 서 너 명에게만 지급되어서 너무 많은 포로를 잡으면 농가에서 가져온 새끼로 묶어서 한 줄로 연행해왔다.

라이프 지에 소개 된 공비 창궐 지역의 경찰 초소- 도로 요충지등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공비들의 공격을 자주 받았었다.​


열악한 의료 상황

전투 경찰들도 국군과 같이 전투에서 죽고 부상당했었다. 해방후의 혼란 정국과 한국 전쟁 중에 전사한 전투 경찰만 무려 만 명이 넘었었다. 이는 파월 국군이 8년간의 월남전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두 배나 되는 숫자다. 

그러나 군과 같은 의료 시설은 전무였었다.의무병도 없었고 지급된 약도 없었다. 그런 예산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남원에 경찰 병원이 긴급히 개설되기는 했으나 그 혜택을 입은 경찰들은 극소수였다.중상을 입은 경찰은 읍내 민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경찰이 수술비나 입원비를 낼 형편이 못 되어서 의사의 선심에 기대어야 했다. 

​강경위의 사찰 유격대에서 공비들과의 교전에서 세 명의 총상을 입은 부상자가 발생했었다. 위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현지에는 ​단순한 옥시풀이나 머큐롬같은 약도 없어서 총상의 치료는 민간 요법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민간 처방이란 약초로서 만든 고약이나 늙은 호박을 환부에 붙이고 몸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이 의료 분야에 관해서는 경찰이나 공비들은 꼭 같았었다. 그래도 경찰은 치료를 위한 민가가 있었으나 추운 산중에서 쉴 자리가 없었던 공비들은 출혈상을 입으면 대개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죽기 마련이었다.


산청 경찰서 사찰 유격대와 격돌한 공비 최강 부대 

강경위의 사찰 유격대가 상대한 산청군 일대의 공비는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의 주모자중 한 명이었던 이영회가 지휘하는 공비 부대였었다. 이 부대는 명칭을 여러 번 바꾸었었다.강 삼수 경위의 부대를 상대할 때의 부대명은 157 사단이었다.

​두목 이영회는 강경위와 같이 일본군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간으로서 14연대 상사였었다. 남부군 사령관이며 남한 공비들의 상징적 지도자였던 이현상에게 충성을 바친 그는 남부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남부군 군사 부문을 총책임지고 있었다. 


이 현상- 만석군의 아들이었으나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물들어 일제하에서 감옥살이를 했었다.


이영회 부대는 공비 부대중 최강 부대로 알려져 있었다.그는 특히 경찰을 미워해서 경찰을 포로로 잡으면 즉석에서 죽여버리는 잔인함을 발휘하였다. 1953년 11월 경찰에게 사살 될 때까지 이영회는 일선 경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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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회는 입대 전 순천 역 앞에서 놀던 깡패였었다고 하던데

이때 경찰에게 시달림을 받은 것이 경찰을 증오하던 감정이 생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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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삼수 경위가 받은 훈장들- 군은 경찰들에게 훈장 수여에 인색하였다.


그러나 강성갑씨는 자기가 근무하던 중에 산청 경찰서 관내에서 공비에게 잡혀 죽은 경찰은 없었다고 한다. 강성갑씨가 산청 유격대에 합류 후에 북한군 패잔병 출신 공비들을 포로로 잡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북한군 출신 공비 부대들과 자주 접전을 벌인 일은 있었다.


산청 경찰서에서 활약했으며 강삼수 경위를 경찰로 불렀던 백남현 경위의 회고록을 보면 수복 직후 산청군에서 발호하던 공비들의 주력 부대가 북한군 출신이었다는데 51년 후반에는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성갑씨는 또 여순 14연대 반란군 출신 공비들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뒤에 지리산으로 탈출한 반란군과 좌익들은 700명 정도 되었었다.그 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많이 죽고 북한 남침시에는 200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강성갑씨는 유격대가 이영회 부대와 자주 격돌했으나 생포했었던 포로 중에 14연대 반란군 출신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고 하니 14연대 반란병 출신도 엄중한 토벌에 그 세력이 급감했던 것 같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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