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3-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3 탄]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3-


인간 강삼수​​​

​강성갑씨가 회고하는 강경위는 성질이 괄괄했지만 인정이 넘치는 성격이었다. 강삼수 경위는 공비 포로를 잡으면 포로의 개인 보급 선[線]을 묻지 않았었다. 현지민 출신들이 많은 공비들에게는 정에 못이겨 은근히 생필품과 식량을 대주는 친척이니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었다. 경찰은 생포한 공비들을 엄중 취조하여 그 보급선을 알아내서 그들을 부역자로서 체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렇게 하면 더욱 전공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위는 그들이 인간의 정 때문에 어쩔 수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십분 이해하고 이를 굳이 캐서 집안에 불행을 주고 원성을 사는 행위를 삼갔었다.

​강삼수 경위 후년의 모습


강경위는 특히 자기 고향 금서면 출신 포로들은 경찰서로 후송하지 않고 어떻게든 설득하여 전향자로 만들어서 경찰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게 하고 상부의 허가를 받아 방면하였다.

  

강성갑씨의 회고가 아니라 그가 인정있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경위의 조카이자 경상대 교수 출신의 시인 강희근 교수는 전쟁 중에 아주 어렸을 때 자기가 직접 목격했던 광경을 나에게 회고했었다.


사찰 유격대가 작전 중에 그의 고향인 금서면 화계리의 마을 회관에서 잠시 머무른 일이 있었다. 유격대원 하나가 술이 취해서 화계리 마을 밖의 개울가에서 총질을 한 일이 있었다. 공비들이 출몰할 때라서 주민들은 벌컥 뒤집어지게 놀랐다. 그 대원은 즉각 마을 회관의 강삼수 대장에게 불려왔다 .

 

​그런 실수는 당시 귀싸대기를 열 번쯤 맞을 체벌에 해당했었다. 작은 아버지의 괄괄한 성격이나 그날 총소리에 놀랐던 주민들의 반응으로 보아서 그 대원은 엄청나게 얻어맞을 줄 알았던 강희근 시인은 침을 삼키며 지켜보았다. 술이 취한 대원은 횡설수설하였다.

‘대장님! 제가 대장님을 너무 사랑해서 축포로서 한 방 쏘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강경위는 빙그레 웃으며 “ 왜그랬어? 가서 쉬어.”라고 한 마디하고 말더라는 것이다.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철모로는 아들을 타이는 듯한 모습이 엄한 작은 아버지의 모습만 보아온 어린 강희근 시인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사찰 유격대의 규모​

강성갑 씨의 회고를 통하여 강삼수 경위의 사찰 유격대 규모룰 들어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병력이었기에 그런 대단한 전공을 올렸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주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산청 사찰 유격대의 숫자가 열 네 명까지 늘린 일이 있었지만 대개는 10명 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견으로서 유격대의 규모는 일곱명 내외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이 되면 은밀 행동에 제약이 있고 민첩한 기동 전개에도 지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 게릴라전 교범에도 나오는 이상적인 습격과 정찰 목적의 게릴라 부대 숫자와 거의 일치한다.

​유격대원은 산청군 출신으로서 모두 근방 지리에 밝고 산을 잘 타는 건강한 사람들만을 대원으로 뽑아서 편성하였다. 대원들은 계속 산을 타다 보니 전문 산악인을 뛰어넘는 산타기의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런 등반 기술은 야간에 마을을 약탈을 하고 비트로 돌아가는 공비들을 앞질러 가서 매복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강성갑씨는 공비 토벌은 산을 타는 전투 출동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강삼수 경위가 이끌었던 사찰 유격대는 결국 세계 일류의 산악 부대였다고도 볼 수가 있을 듯하다.

 

  ​전북 고창의 지서 보루 [감시와 전투에 사용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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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는 주로 강경위 고향인 금서면 화계리 주둔소에 장기간 머물렀지만 적정이 심한 곳이라면 신안면, 신등면 단성면등 여러 곳을 이동하며 공비들을 토벌했다. 강경위의 전투 기록에는 그가 화계리 주둔소장으로 소개 된 글들이 있는데 ​화계 주둔소장은 박문석이라는 다른 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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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둔소는 지서의 하부 조직으로서 적정이 심하지만 보호해야 할 주민들이 있던 곳에 설치했던 지서의 하부 기관이었다. 화계리 주둔소는 사방을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고 주민들도 그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생활하였다. 유격대는 주둔소 건물 옆의 민가에서 머물렀다.

산청 경찰서 사찰계의 지시로 본서에서도 근무했었는데 대원들은 경찰서에서 지척인 금서면 내촌리에서 숙박했었다.



유격대원의 생활

유격대는 천막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출동 지역 부락 민가에 투숙하고 주둔했었다. 유격대는 본서로부터 이런 주둔 경비에 대한 아무런 예산을 지원받지 못해 할 수없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화계리에 주둔할 때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안남미를 ​먹었었다. 재정 상태가 극히 안 좋았던 정부는 경찰관들이나 공무원들에게 가족 식량으로 안남미를 지급하기도 하였다. 안남미는 맛이 없어서 인기도 없었지만 배고픈 시절 모두 감지덕지하며 먹었었다. 출동할 때 안남미를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미처 못 챙기면 주민들에게 신세를 지는 때가 있었다.


​유격대가 주둔하는 부락의 이장에게는 미리 통보가 갔었다. 이장은 주민들과 상의해서 유숙할 집을 지정하고 각 민가마다 한 두 되씩 쌀을 걷어서 유격대가 주둔하는 민가 부엌에 가져다 놓았다.

​취사는 각 집마다 하루씩 돌아가며 담당했었다. 반찬은 시골 농가에서 먹는 수준과 다를 바 없어서 김치와 된장이 표준 식단이었다. 가끔 생채나 나물 등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닭이나 돼지고기 같은 육류는 좀체 구경하기가 힘들었었다.

강성갑씨는 경찰에 아무런 재정 여유는 없었고 공비 토벌을 위해서 자고 먹기는 해야 했으니 주민들에게 피해를 준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지금 같으면 대단한 민원이 일어나겠지만 그때 주민들은 공비들의 식량 강도질에 질려있었고 공비들을 없애준다는 경찰을 도와야 하는 대의명분에 별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산으로 출동 할 때는 식사대신 소금물을 바른 주먹밥 두어 개를 배낭에 넣어서 출동하기도 했었고 운이 좋아서 인심 좋은 부락민을 만나면 콩고물 바른 인절미를 얻어가지고 출동했었다고 한다.

지급된 모포는 있었으나 산에서 야숙을 한 일은 없었다. 무기 외에 별다른 지급 장비가 없던 사찰 유격대에 미제 배낭과 모포는 지급되었었다.

출동한 뒤에 매복하는 경우 외에는 아무리 추워도 새벽이 될 때까지라도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거나 미리 잠자리를 부탁해놓은 부락에 들어와서  취침했었다.


당시의 전투 경찰의 복색과 무기. 군인 복장과 같았으나 속에 입은 옷깃을 밖으로 내놓았었다.


부대원은 다른 경찰과 같이 광복에 푸른 물을 드린 군복을 입었었고 신발은 대원 각자가 장마당에서 구입한 농구화를 신었다.출동 할 때의 휴대 실탄은 대개 30발 들이 탄창 두 개였지만 세 개를 가지고 갈 때도 있었다.[당시 전투에 돌입하던 국군은 120발을 휴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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