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의 뻔뻔한 억지“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1-

[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1-



1953년 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참혹했던 민족상쟁의 6.25 전쟁이 조국 분단의 결과로서 끝이 났다. 이어서 쌍방간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


여기서 참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유엔군이 돌려보낸 공산군의 포로는 북한군 포로 2만 7천 명를 포함한 14만 1천명이었다. 그러나 북에서 돌아온 국군 포로는 단지 4천 명에 유엔군 포로 3천여 명 뿐이었다.


유엔군은 그렇다 해도 돌아온 국군 포로의 수는 상식으로 보아도 너무 적다. 의심을 안 가질 수가 있다. 이 말은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북한에서 억류하고 있는 포로들이 일 만 명이 넘는다고 믿고 있고 북한은 억류하고 있는 국군 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그 배경과 실상을 밝혀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하자면 국방부의 주장이 절대 맞다. 그러나 북한도 뻔뻔한 그들 나름의 핑계가 있다.북한은 동족인 국군 포로들을 질병과 학대로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포로 수용소에 억류하여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그들을 교활하게 유혹하여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북한의 억지 논리는 북한군이 된 이들은 포로가 아니라 귀순자니까 송환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제로 북한군이 된 포로들은 전쟁이 끝나자 쓰레기장에 버려진 쓰레기 같이 폐기되었다. 국군 포로들이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은 대부분 광산의 막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 사회에서 짐승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세상을 떴고 또 뜨고 있다.


현대는 과거처럼 포로를 노비로 삼아 버리는 만행이 허락되지 않는 인권 문명의 시기다. 그러나 북한은 각 부모의 귀한 자식이기도 한 국군 포로들을 정권의 노비로 삼아버렸다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악덕의 행위로 인해서 무수한 미귀환 포로들과 가족들이 한 많은 눈물을 뿌리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북한 정권은 여전히 이들이 ‘공화국’이 좋아서 북한에 잔류한 사람들이라는 60년 전의 생떼에서 한 발도 벗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



중공군에게 끌려가는 국군 포로들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의 비극적인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떻게 그들이 북한군으로 강제 편입되었고, 북한군에서의 생활을 어떠했었고, 군에서 떠난 후 북한에서 어떻게 연명해갔는가를 필자가 얻은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단계적으로 보여드리겠다.


국군 포로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던 극한 상황에서 쉽게 꼬임에 빠져 북한 군복으로 갈아입던 과정을 지켜보았던 국군 포로의 증언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대구에서 박진홍 정형외과를 개업하고 있는 박진홍 선생의 증언이다. 아직도 80을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팔팔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시는 박 선생은 이제는 다 잊고만 싶다고 말씀하신다. 


박진홍 선생은 대구의대 2학년 재학 때 6.25 동란을 만났다. 낙동강 전선의 전황이 악회 되었을 때 동급생들과 함께 군에 지원하였다. 그는 7사단 위생병으로 평북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대공세를 만났다. 사단이 후퇴할 때 어쩔 수없이 중상자들과 함께 뒤에 남겨진 박 선생은 헤매다가 1950년 11월 27일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박진홍 선생은 그 때부터 년 8월 17일 귀환할 때까지 무려 33개월의 긴 세월을 생지옥같은 포로수용소 여러 곳을 전전하며 목숨을 유지해갔다.박 선생은 3년간 벽동, 선천, 천마, 화풍, 강동등의 포로 수용소를 옮겨 다니며 말로 하기 힘든 고생을 했었다.




그의 회고록은 특히 벽동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런 생활을 회상한다. 벽동 수용소는 압록강 수풍 호반(湖畔) 평북 벽동군 우시면의 거주민들을 다 이동시키고 면 전체를 포로 수용소로 만든 곳으로서 유엔군과 국군을 격리해서 수용했었다.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은 배급된 150 알의 통강냉이로 하루를 연명하여야 했다. 통강냉이란 삶지 않은 강냉이 알을 말한다.추운 겨울철에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야윌대로야윈 포로들의 몸에 내습해서 발진티프스 병균을 옮기고 피를 빨아 먹었다.


아무리 튼튼한 젊은이라해도 이런 생지옥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2,500명의 포로들이 수용된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매일 20명에서 50명씩 의 포로들이 죽어나갔다.박 선생은 이들 포로들이 죽으면 그 옷은 모두 벗겨져 동료 포로들이 나누어 가지고 시체는 알몸으로 수레에 실려져 수용소 밖의 산에 운반해서 매장되었던 냉혹한 순간을 회고한다. 매장은 땅이 돌처럼 얼어붙어 팔 수가 없어서 대강 눈 속에 묻고 눈으로 덮는 수준이었다 


장례식 같은 것도 없었고 추모 기도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내다 버린다는 표현이 맞다. 박 선생은 생지옥인 포로 수용소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저 세상으로 떠난 포로들의 얼굴만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국군 포로들은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전우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공포감에 휩싸였다. 국군 포로들은 빠르면 조만간 자기도 저렇게 버려지는 송장의 신세가 될 것이라는 체념과 두려움을 느끼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전우들이 매일 죽어나가는 이런 생지옥에 교활한 북한군 정치 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첫 대면에서부터 국군 포로들을 해방전사(解放戰士)라고 부르며 친근한 척하는 가면을 썼다. 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된 전사라는 뜻이다.


포로 수용소 앞의 수풍호에서 수영을 하는 유엔군 포로들


정치 장교들은 포로들을 100명 단위로 나누어서 학습조를 짰다. 국군 포로들은 이 정치 장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사상 교육을 시킬 것인가하고 은근히 겁을 먹었었다. 무슨 거창한 말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했었다.




중공군의 정치 학습- 듣는 미군들은 무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식의 설득에 넘어가 중국으로 간 미군 포로가 21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정치 장교가 늘어놓는 교육 내용에 정치 사상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여기에서 강냉이 몇 알 먹고 배고프게 있지 말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민군에 자원 입대하면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준다는 것이 그 전부였다.


국군 포로들을 죽음의 아슬아슬한 문턱에 몰아넣은 다음 그들이 내놓은 것은 인민군 입대 권유라는 초대장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정치 장교의 행태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모병 장교의 행태였다. 정치 장교의 말투는 강압하는 어조도 아니고 선동적인 어조도 아니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거부감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설득조였다.(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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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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