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8-

[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8- 


북한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1950년 7월 7일 천안에서 또 다시 전투가 있었다. 천안에는 24사단 34연대가 로버트 R.마틴 대령의 지휘로 전개하고 있었다. 


유경수식 전차 돌격이 천안 시내에서도 행해졌다. 이 전투에서 연대장 마틴 연대장이 2.36인치 로케트 포를 가지고 T-34 전차와 직접 대결하다가 전차포에 맞아 전사했다. 이틀간의 전투 후에 미 연대는 또다시 패배하고 대전으로 철수했다.


대전에는 일본에 있던 본대인 24사단이 옮겨와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대전을 사수하던 미 24사단도 패배하고 사단장 딘 소장은 낙오된 뒤에 헤매다가 37일 뒤에 포로가 되었다.



사단장 딘 소장이 직접 파괴한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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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전 전투에서 4사단 18연대의 1개 대대가 대전과 영동간 경부선을 차단해서 미 24사단이 와해되게 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결국 미 24사단은 전쟁초기 어쩔 수없이 시간에 쫓기며 축차 투입되어 대대 -연대- 사단 순으로 희생되어서 낙동강 전선에 미군들이 증강되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한편 박 선생의 부대는 오산을 통과하고 나서부터 점점 강해지는 미군의 저항을 느끼지 시작했다 미군의 폭격이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오산에서 미군의 공중 지원 없이 보병 전투를 하다가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증파가 빠른 공중 공격부터 강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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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북한군 차량이나 전차들은 주간에도 이동을 해왔는데 7월 10일 평택 남방에서 북한군 105전차 여단은 치명적인 공중 폭격을 경험하였다. 이 폭격에서 겁없이 주간 행군을 하던 북한군 105 전차 사단의 전차 38량과 자주포 7량, 트럭 117대가 박살 나는 대타격을 받았다. 이 큰 공습 뒤에 남침 북한군의 전차 부대나 차량 부대는 밤에만 이동하는 야간 행군을 하였다.


완전 무장한 F-51기가 폭우 뒤에 한국 비행장을 이륙하고 있다.



오산 전투의 수훈자 18연대장 장교덕부터 그 폭격의 첫 목표가 되었다. 그는 오산 전투가 승리로 끝내고 영웅 칭호를 받았다.장 교덕은 그 공으로 바로 사단장으로 영전하였다. 새 임지로 가던 그의 찝차는 평택 남방에서 미 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장 교덕은 사단장 취임 대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4사단 18 연대장직에 3대대장 이주설이 임명되었지만 그도 며칠 뒤의 폭격에 죽고 말았다. 연대장직은 참모장 출신인 송덕만에게 돌아갔다. 폭격은 남진하는 4사단 18연대에게 쉬지 않고 가해졌다. 박 선생은 이후 자기가 부상으로 후송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폭격을 받았다고 한다.


대전에서 영동으로 우회 침투를 하여 대전 함락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지만 4사단 18연대는 자꾸 병력을 잃어갔다. 추풍령에서 미국 보급소를 기습해서 전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북한군 최강 연대의 전공은 여기까지였다.


낙동강 전선은 18연대에게 죽음을 양산하는 맷돌과도 같았다. 매일의 전투와 매일의 폭격으로 중국의 내전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4사단 18 연대원들은 절반이 죽어 나가고 그 자리는 의욕도 경험도 없는 남한 출신 의용군들이 차지했다. 


강제로 징집해온 그들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다. 도망병들이 속출하였다. 이런 중에도 낙동강을 도강해서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 일성의 성화에 여러 번 도강 작전을 시도하다가 막강한 미군의 화력에 걸려 큰 피해만 입고 번번이 실수하기만 하였다.


박 선생은 그의 부대와 제일 여러 번 전투를 했던 부대가 24사단 25연대인 것으로 기억한다. 이 연대는 거의 흑인들로만 편성된 약체 연대였으나 그래도 그 약체 연대가 휘두르는 화력은 이미 약체가 된 3사단 18연대에게 힘겨운 것이었다.


박 선생은 8월 중순에 감행한 어느 낙동강 도강 작전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안동의 북한군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어 구사일생으로 생명은 건졌다. 박 선생이 부상을 입은 도강 작전은 경남 창녕 영산의 낙동강에서 있었던 작전으로 추측된다. 며칠 뒤인 8월 17일 이곳에서 대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는 영산 전투라고 부르기도 하고 오봉리 능선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봉리 능선 전투에서 낙동강을 도강해온 북한군 4사단 18연대를 맞받아친 부대는 세계 최강 보병 사단을 자부하는 미 해병 1사단 소속 7연대였다.



영산 전투의 미 해병대 



7연대는 인천에 상륙했던 부대이기도 하고 장진호 최전선 유담리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내습한 중공군과 싸워서 격퇴한 부대이기도 하다. 영산 전투에서 4사단 18연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 부대로서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북한군 최강의 연대는 세계 최강의 연대에게는 별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대 타격을 입은 4 사단은 이 전투 후에 다시는 일선에 배치할 수준으로 전투력을 보강하지 못하고 진남포 부근에서 해안선 방어 부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휴전을 맞았다. 


그가 입원 중에 연합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였다. 총퇴각 명령에 박 선생은 죽을 힘을 다해서 아직도 완치가 안 된 몸을 끌고 태백산맥을 따라 북한 강계까지 퇴각하였다. 


박 선생은 여기서 북한내 치료는 힘들다는 판정을 받고 중국 길림의 중공군 병원에 후송되었다. 입원 중 18연대가 강계에서 재편성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겨우 완치가 된 뒤에 다시 북한군 4사단으로 원대 복귀했으나 너는 이미 부상으로 상이 제대 처리가 되었으니 돌아가라고 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박 선생은 조금 쉬다가 52년도에 연변 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해서 학자의 길을 걸었다.


박 선생은 남자들이 그렇듯 군 생활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점령 전투들에서 연패하던 국군에 대한 상대적 자부심과 오산 전투 승리 후에 미군에게 느꼈던 경멸감을 지금도 뇌리의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고향 동료들을 전선에 내몰아 태반을 죽게 만든 북한 김 일성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박 선생은 6.25 전쟁은 김 일성의 오산으로 인한 남한 침공으로 발발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잘라 말한다.


박 선생은 주력군으로서 남침의 선두에서 38선을 넘어갔던 조선족 부대들이 유엔군의 포화로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도 이의 공로를 알아 주기는커녕 살아남은 간부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사실에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었다. 


김 일성의 사단장들 중에 제일 능력있었던 중국 출신 사단장들이 전쟁 중에 제거되기 시작해서 하나씩 사라졌다.10년이 되지 않아 6.25 전쟁 중에 중대장급 이상으로 참전했었던 조선족 간부들은 모두 숙청하고 북한군의 하급 요직까지도 김 일성 직계 빨치산 출신 장교들로 채워졌다.


박 선생은 자신이 침략의 최선봉에 섰던 6.25전쟁을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한다.

“ 잘못된 전쟁이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습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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