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7-

[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7- 



105 전차 여단장 유경수는 서울 북방에서 터득한 전차 단독의 공격 교리를 미군과의 전투에서 다시 동원하였다. 전차 8량으로 돌파로 시도해도 미군이 동요하지 않자 그는 휘하 전차 연대의 전차 대부분을 투입했다 .



왜관에서 파괴된 T-34 탱크 – 그 좋은 날은 대전 전투 때까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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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죽미령의 미군들은 잡병 수준의 미숙한 부대였으나 지휘관인 스미스 증령이나 포병 대대장 페리 중령이 전투 경험 풍부한 노련한 지휘관들이었다. 비록 적 전차가 방어선을 관통했음에도 두 지휘관들은 병력을 엄하게 장악해서 유경수가 기대했던 부대 붕괴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전차에 돌격당하고도 붕괴 도주하지 않았던 부대를 지휘한 스미스 중령의 전투 지휘력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유경수는 대부대의 전차만의 단독 돌격 전법은 불과 2주 뒤에 대전과 그 후 다부동에서 시도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밝혔었다. 대부대에 의한 돌격에도 스미스 부대가 부서지지 않자 유경수는 비로소 보전포의 전통 전술을 구사했다. 전차만의 돌격과 보전포의 공격 사이에 두어 시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공격대 준비에 시간이 필요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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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무렵, 수원 쪽에서 전차 세 대를 앞세운 길이 9 km의 보병 탑승 트럭 행렬이 나타났다. 북한군 4사단 18연대와 16연대 병력이었다. 북한군이 전차대에 돌파당하고도 그냥 버티는 미군을 보고 놀랐듯 미군도 역시 자기들이 미군임을 알고도 덤벼드는 북한군들을 보고 놀랐다.


북한군의 트럭, 1950년 밀양 부근에서 노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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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45분경, 북한군 행렬이 사거리 1km내에 들어 왔을 때 스미스 중령은 일제 사격을 명했다. 북한군 보병들은 모두 빠르게 하차하여 대피하였고 이중 1천명이 동쪽으로 우회 이동하였다. 


300미터 앞까지 다가온 적 전차들은 정지하고 미 보병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45분 뒤에는 북한군 보병 병력은 둘로 이분(二分)하여 일부 부대가 서쪽으로 이동해서 미군 좌측으로도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스미스 중령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했었던 동쪽의 병력 일부를 서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이어서 스미스 특임부대는 적의 치열한 박격포와 포 사격을 받아야 했다. 앞에서 말 한대로 18연대 일부 병력에 의한 후방 차단의 기동마저 관측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후방의 포병들과 연락을 하려고 애를 썼으나 적 전차가 뭉개버린 전화선의 절단으로 불가능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포병들이 후방으로 돌격한 적 전차 부대에게 전멸했다고 생각하고 포병 지원을 단념하였다. 


14:45, 버틸만큼 버티었다고 생각한 스미스 중령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B 중대와 C 중대가 축차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1개 소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해 고립되어 섬멸되었고 개활지로 철수하던 미군은 북한군의 화력에 노출되어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에서 미군은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의 포로와 26명이 실종되고 대부분의 장비를 빼앗겼다. 82명의 포로 중에 32명은 포로 교환 때 귀환하지 못하고  북한 땅에서 죽었다. 북한군 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의 피해를 입었고 105전차 사단은 전차 4량을 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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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은 전투 전에는 크게 긴장했었는데 승리로 끝난 미군과의 대결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 미군들 강한 줄 알았었는데 형편없더군요.”라고 회고한다. 

북한 최강 연대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첫 전투인 이 오산 전투에서 얻은 승리로서 그가 미군에게 주는 점수는 박하였다.


“미군들은 차 없이는 꼼짝도 못했고,특히 밤에는 전혀 전투를 하려고 하지를 않았어요.최신 무기만 없었으면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죠. ”


오산 전투를 분석해본다. 오산 전투에서 미군이 패배했던 이유가 있었다.


1. 시간에 쫓긴 미군은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준비가 안 된 병력을 동원하였다. 급박한 상황이 그런 작전을 강요했었으나 애초 시작해서는 안 되는 전투를 미군은 시작했던 것이다.


2. 반면 북한군은 전투 경험 풍부한 최강 4사단 18연대를 투입하였다. 전투 승패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덜 준비된 미군에게 무려 다섯 배가 넘는 북한군 최강 부대가 공격한 상황에서 결판이 났다.


4. 남침하는 북한군 전투력의 핵심은 전차였었다. 서울 북방의 전투에서 패배한 국군은 이를 뼈저리게 체험했었으나 미군은 전차의 위력을 경시했었다. 나중에 급히 미국에서 공수되어 대전 전투에 투입된 3.5인치 로케트 포가 미리 오산에 투입만 되었어도 미군은 더 완강하게 버틸 수가 있었을 것이다.



5인치 로케트 포



5. 이 미군의 패배가 큰 피해를 동반했었던 이유는 가능한한 최대한의 지연을 해야 한다는 특임대 임무에 지나치게 집착했었던 스미스 대대장이 철수 시기를  너무 늦추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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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황망히 도주하느라 그날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들을 후송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그대로 담가(擔架)에 눕힌 채 놓아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복 후에 돌아와 보니 이들이 모두 학살되어 흙으로 대충 덮여져 매장되어 있었다.박 선생에게 18연대가 미군 포로들을 학살했느냐고 물으니 펄쩍 뛴다.중국 모 택동 군에 있을 때부터 포로 학살 금지를 엄중하게 교육 받았던 자기 부대는 6.25 전쟁 동안 단 한 명의 포로를 학살한 일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한다.


그는 오산 전선에서의 미군 부상병에 대한 학살은 전장 처리를 맡은 후속 105 사단 모터 사이클 부대나 4사단 16연대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였다.105 사단 모터 사이클 부대는 서울 점령 후 서울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국군 환자등을 무차별로 학살한 경력이 있는 잔인한 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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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생존자들의 대다수는 트럭으로 오산 죽미령 전투장을 탈출했다. 이미 다수의 북한군 전차들이 오산을 향하여 내려가 도로를 차단하고 있을 것이니 그대로 온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스미스 중령과 부대원들은 오산을 우회하는 안성 경유로 천안 남쪽으로 철수했다.


흩어져 낙오한 미군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나 서해안까지 간 병사도 있었고 닷새 후에야 겨우 살아서 천안 이남의 본대로 돌아온 병사도 있었다. 스미스 특임부대는 재편성과 재보급이 있을 때까지 전투 부대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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