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3-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3-


생사기로가 눈앞에 어른거리는지라 각 포병들의 포사격도 필사적이었다. 포가 정렬된 도로 후방은 금새 화약 냄새로 가득 찼다. 


포병들은 시간이 없어서 포의 방열을 물론 언 땅에 포다리를 제대로 고정시키지도 못했다. 각 야포의 포수들은 포 다리에 달려들어 온몸으로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해서 포의 후퇴를 최소화시켰다. 


그래도 포탄을 발사할 때마다 포는 포병들을 매달고 뒤로 수 미터씩 후퇴하였다. 몇 발을 발사하면 포병들은 포를 앞으로 밀어내서 원위치해서 사격을 하고 또 매달려서 뒤로 후퇴했다. 


난사라고 표현할 만큼 정신없는 사격 속에서 포탄을 가리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포병들은 그저 포탄 박스 안에서 황급히 꺼낸 탄들 손에 닿는대로 발사하였다. 


돌격하는 중공군에게 퍼부어진 포탄들은 각양각색이어서 고폭탄, 대전차 고폭탄, 백린 연막탄 등 닥치는 대로 폐쇄기에 장전하여 몰려드는 중공군들에게 발사했는데 근거리 사격이라서 폭발한 포탄 파편들이 포병 진지까지 날아왔다. 


해병들의 장진호 철수


그러나 포병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장전과 사격과 포의 원위치 이동을 계속하였다.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중공군이 물 뿌리듯이 쏴대는 따발총의 총탄이 주변에 마구 날아들며 포병 여러 명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러나 총탄이 아니라 포탄의 소나기를 맞은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더 컸다. 근거리에서 포탄의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숱한 중공군들은 비명 속에 죽어나갔다. 누비옷을 입은 중공군의 사지가 잘려서 사방으로 날아가고 절단된 신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처절한 비명과 시체 토막이 주변에 무더기로 난비하자 중공군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피해가 워낙 커지자 중공군 지휘관은 안 될 전투라고 판단하고 후퇴 나팔을 불어 누더기가 된 부대를 모두 철도를 넘어 산으로 퇴각 시켰다. 도망치는 중공군의 뒤를 간접사격으로 사법을 바뀐 포병들의 포탄들이 간격을 두지 않고 뒤따르며 연타를 가했다.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 대부대에서 신체가 멀쩡하게 후퇴한 생존자들은 소수였다. 중공군이 퇴각한 뒤 해병 포병대가 전장 정리를 하면서 세어보니 처참하게 죽은 중공군의 사체가 500구가 넘었다. 해병 보병들이 아니라 포병들에게 돌격하다가 포탄들에 당했기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사체들 태반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미 해병의 G포대와 H포대가 짧은 시간 동안 돌격하던 중공군에게 발사한 포탄은 총합계, 600발 이상이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전사 3명과 34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전투 지휘를 했던 페리 대위는 이 전투를 이렇게 자체 평가하였다. 

“포병 전투사에 야전 포병이 돌격하는 보병들을 상대로 그런 엄청난 전과를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해병 포병대는 보병 전투에서만 실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포병대는 사단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던 하갈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방 유담리로 진출한 해병 2개 연대와 하갈우리를 잇는 좁은 길의 중간에 덕동고개라는 요지가 있었다. 이 곳을 해병 1개 중대가 점령하고 있다가 11월 27일 중공군 연대 병력의 공격을 받았다.


해병 1개 중대는 닷새간의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해서 중공군의 공격을 분쇄하고 이 고지를 지켜내 유담리 진출 해병 2개 연대의 철수를 가능케 했다. 이들의 방어 성공은 포사격의 극한 거리인 10km나 먼 원거리 후방 하갈우리에 있었던 해병 포병대의 정확한 사격에 크게 힘 입은 바 있었다.


이 포병대는 또 11월 28일 해병 본부가 있던 고토리에 가한 중공군의 대병력을 격퇴함에도 큰 활약을 했었다.


포병대의 전투 후 해병대는 고토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남쪽의 진흥리로 철수해서 마침내 중공군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해병대는 트럭 일천여대에 해병들은 모든 군수품과 부상자와 전사자의 사체까지도 대부분 다 데리고 나왔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강인한 해병들은 미 8군 육군이 서부 전선 평안도에서 당했듯 와해된 중대 단위 소부대가 단 하나도 없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생존하였다.


미 해병대의 2주간에 걸친 장진호 철수 작전에서 격렬한 전투를 수십 회를 되풀이 했는데도 해병대의 전사자는 700명에 실종자 200명의 손실만을 입었다. 반면 중공군의 전사자는 거의 투입병력 절반에 달하는 2만 5천명 전사와 부상자 1만 2천 500명의 대손실을 당했다.


더해서 해병의 철수 작전 동안 미 해병대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잔혹한 추위는 방한 장구가 부실했던 중공군 대부분을 동상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해병대의 철수


장진호 전역에 동원된 중공군은 대규모 화력에 붕괴되는 부대나 입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대병단의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몸만 망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 장진호 전투 뒤에 중공군에게 내려진 전사가들의 평가였다. 그들이 쫓던 해병대가 흥남 부두를 떠나고 나서도 만신창이가 된 중공군 9병단은 다음 작전들에서 제외되어 4개월이나 함흥 평야에 머물며 휴식과 재정비만을 해야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2

  • 임 승기 2015.06.01 15:25

    장진호 전투의 백미는 위에서 언급된 해병 7연대 F중대의 덕동고개전투라고 생각합니다. 증강된 일개 중대가 중공군 연대규모 병력의 공격을 나흘동안 막아내어 5연대와 7연대의 퇴로를 확보해 주었고, 또한 F 중대를 구원하기 위해 7연대 1대대가 중공군이 예측하지 못한 야간 기동및 공격을 감행하여 덕동고개를 확보한 작전도 기억되어야 하지요. 덕동고개전투에서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의회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가 3명이나 나온 것도 이런 점들을 고려한 때문이겠지요.

  • David 2015.06.02 05:28

    혹 용산 전쟁 기념관에 장진호 전투에 대한 전시물이 잇나요? 알다 시피 장진호 미 해병 전투는 한국전 역사에 빼놀 수 없는 항목 인데 말이죠. 작년 여름 버지니아 주 소재 미 해병 박물관 에 가보니 이차대전 당시 미 해병의 과달카날, 오키나와 상륙전 과 함께, 장진호 전투 전시관 이 잇던데, 동게전투 의 환경을 실감케 하려고 여름 날씨 임에도 춥게 느낄만큼 에어콘 을 쎄게 틀어 낫고, 지형 지물 과 음향 효과 를 잘 해 놧더군요. 쵸신이 일본 발음 인데, 왜 한국전 의 지명을 일본식 으로 해야하냐고 정정 할것을 박물관 측에 말햇더니 그 분들 말이, 자기네 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아는데, 이미 Chosin few 란 말이 거의 고유명사 화 되서 바꾸기가 그렇타고 오히려 한국사람 인 저에게 이해를 구 하더군요. 미 해병 박물관 건물 내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 장진호 전투 전시관을 보니 미 해병대가 얼마나 장진호 전투 에 대한 자부감을 갓고 잇나 하는걸 느낄 수 잇썻습니다. 비록 외국 군대 가 수행한 전투 엿지만, 내 땅에서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 요 그들의 희생 이엿쓰니 우리도 그 에 맛는 에우가 잇써야 되지 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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