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대학살 - 중공군 대패의 춘계공세 -최종-

  

 

 

 

 

 

지상 화력만 중공군 사냥에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새카많게 뒤덮은 미 공군 전투기들이 각다귀들 같이 달려들어 민둥산의 계곡과 능선에 그대로 노출된 수많은 중공군을 기총소사를 하고 로켓 폭격을 했다. 드물지만 진지를 만들고 저항하는 중공군들에게는 쌍발의 B26기가 날아와 끔찍한 네이팜탄의 불비를 뿌렸다.

 

 

 

M26 탱크의 시가지 전투 - 서울 수복 작전때

 

 

중공군을 한반도 중앙에서 동서로 단절해놓고 미군과 한국군은 금화와 철원선에서야 겨우 진격을 멈추었다. 중앙이 뚫리자 유엔군은 한국의 전 전선에서 맹반격을 했다. 중부 전선에 크게 뚫린 구멍으로 인해 측면 공격을 두려워했던 서부 전선의 중공군과 동부 전선의 중공군도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동안 수 없는 중공군이 죽었다. 유엔군의 화력으로 죽기도 했지만 이미 식량이 떨어진 상태라서 굶주림으로 죽기도 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보급품을 나르던 죄 없는 몽골 말들도 엄청나게 죽었다. 아이러니컬하게 이들 중공군 병사들을 아사에서 구해준 것은 한국의 산야에서 파릇파릇하게 나던 나물들이었다. 전사자만 많이 나온 것이 아니라 항복한 병사도 많았다. 굶주림과 화력 앞에서 버티어 낼 중공군 병사는 별로 없었다.

 

 

 

화천 지역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중공군 

대부분 순박한 농민들인 중공군은 일본군처럼 극한상황까지 저항하는 경우는 적었다.

 

 

 

중공군의 적 사살 통계나 자신들의 피해보고는 도대체가 신뢰할 수 없지만 5차 전역의 2단계 작전에 죽은 사람만 3만 명이나 된다고 발표했다. 1단계 전역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은 중공군의 붕괴와 괴멸은 한국군과 미군들에게 대단한 전과였다. 파로호라는 호수 이름을 탄생시킨 제6사단의 대승도 이 추격전 중에 탄생하였다.

 

미군들은 중공군의 대량 섬멸로 끝난 중공군의 5차 전역 2단계를 오월의 대학살[May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학살 당하듯이 중공군이 죽었다는 것이다철원 북방까지 쫓겨간 뒤에 중공군에게 더 이상 저항할 변변한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드디어 유엔군에게 맥아더가 염원하던 적의 대량 섬멸을 위한 최고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미군의 전차 200대가 주역이 되어 이룬 공로니 좀 더 많은 기계화부대 병력만 있었다면 그대로 치고 북상하여 대동강을 넘어 평양을 포함한 대포위망을 형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평양지역에 중공군 4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전차화기가 빈약하여 평양 이북으로 물러갔거나 막았어도 붕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행정 장교들과 다음 선거만 생각하고 있던 트루먼은 한국 전쟁을 끝내 버릴 이 절호의 찬스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유엔군은 원래의 진출 계획선[철원 김화]에서 정지해야만 했다.

 

5차 전역이 끝나고 죽었다가 살아난 중공군의 병사나 장군들은 허망한 꿈에서 깨어났다불과 한 달 전까지 대전과 안동을 어떻게 하는 들뜬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던 모택동도 즉시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그는 당 최고 회의를 열고 한반도의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대치하며 미국과의 휴전을 추진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말했다그 뒤에 그의 입에서 더 이상 미군을 부산 앞 바다로 쓸어 넣고 한국을 공산 통일 하자는 헛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실패로 끝난 5차 전역은 결과적으로 맥아더가 청천강 이북에서 철수하여 이들을 남한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려던 전략은 워싱턴의 지원 거부와 조심스러운 팽덕회의 진격 중지로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대량 섬멸 기회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온 중공군의 과대망상적인 전략 판단이 제공했다. 단지 모두 섬멸해버릴 기회는 유엔군 측의 병력부족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군은 200량의 전차만으로 50만 대군의 심장을 찢고 들어가 산산조각을 낸 사실은 중공군이 통상 쓰는 인해 전술이라는 구시대적인 인적 물량 동원의 전략이 대규모 야전에서 기계화부대의 공격에는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인원만 대량 동원하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전략 의식이 이번 무리한 5차 전역을 추진하게 만들었지만 좁은 전투 정면에 무조건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은 병력 운용의 문제, 보급의 문제, 수송의 문제, 통제의 문제 등 여러 가지로 문제점을 들어냈다다시 말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전술단계,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활동 할 수 없는 산악전에서나 유용하지 야전에서는 오히려 대량의 병력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중공군의 무모한 작전은 보여주었다.

 

미군이 철원 김화 지역을 점령한 뒤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516월초 강원도와 함경도 지경에 위치했던 공사동의 팽덕회의 사령부에서 군장[군단장] 이상의 간부들이 모인 대 군사회의가 열렸다.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팽덕회가 입을 열었다. 성질 괄괄하고 욕 잘하는 그였지만 자신의 책임도 컸던 만큼 상당히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한 태도로 말을 해갔지만 불편한 심기는 대목 대목에서 들어났다. 그는 이번 전역의 실패가 능력도 없는 처지에 너무 입을 크게 벌리고 대어를 삼키려고 했던 비현실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연설 초반부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80사장 정기귀와 60군장 위걸의 무능과 실수를 힐책할 때는 자기 성질을 다 들어내어 폭언을 퍼 부었다. (정기귀와 간부들은 병[전사]으로 강등당하고 군에서 쫓겨났다.) 그는 휘하 중공군이 저지른 대실수로써 대전차전 준비의 미비를 지적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군 철수시 반드시 도로를 통제하고 중요한 구간은 파괴하여 적군 탱크 부대의 진격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선부대에서는 이 점을 소홀히 하여 모든 도로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 결과 적군 탱크가 종횡무진으로 덮쳐들었습니다. -

 

그러나 이날 팽덕회의 분노 섞인 질책에서 이번 5차 전역에서 대실패의 가장 정확한 지적은 아래에 있었다. -이 세상에는 강자 위에 또 강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최고로 여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만과 자만은 헌신짝처럼

버려야 합니다. 일단 그런 마음을 지니게 되면 진취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낭패를 봅니다. 겸손에는 항상 낭패가 없습니다.-

 

덕회의 이 말처럼 그들이 벌린 터무니없는 5차 전역 실수의 핵심을 지적한 말은 없다. 택동과 중공군 간부들과 사병들의 사이에 팽배했던 교병[驕兵] 의식이 만용을 부려서 대량의 병력을 적화력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만용을 부리고 숫자의 마술에 취해 대공세를 취했다가 대패를 한 중공군의 5차 전역. 1,2차 춘계공세를 한국 전쟁에서 통일의 기회를 놓쳐 버린 오늘의 한국 민족의 눈으로 분석해본다. 중공군을 한반도로 출병하게 만든 원인은 일단 중국과 일체의 대화를 거부했던 미국의 외교 부재에 책임이 크다대화는 물론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상관하지 않겠지만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는 주은래의 경고를 너무 교만하게 무시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

덜레스의 철없는 짓에 대한 비난을 의식했었던 닉슨은 주은래와 첫 악수를정중하게 했었다.

 

 

맥아더가 추가 병력을 더 파견하고 대만군 5만 명을 출병시키며 중국 연안에 대한 봉쇄 만주 폭격에 부정적이었던  미국 워싱턴 트루먼 - 마샬의 거부는 세월이 지나서 평가해보면 문제가 있었다마샬이 미군이 한반도에 묶여 있는 동안 스탈린이 유럽에서 불장난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한반도에서 다리를 빼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건 참 모순 있는 결정이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 정책 결정에서 스탈린의 의지와 능력을 과대 평가했다.

 

 

 

스탈린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상황을 매우 두려워해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면에서 조심했다. 그는 미국이 한반도에 발이 잡혀 있는 동안 유럽에서 무슨 장난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압록강 상공에 중국 지원차 출동한 소련 조종사들에게 중국어로 무선교신을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려서 소련 조종사들의 반발을 샀던 일도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한반도에서 빨리 발을 빼고 유럽에 집중하겠다는 마샬의 구상은 그 뒤 한국전쟁이 2년 반이나 계속된 사실로 그의 구상이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주동이 되어서 거절했던 미군의 증파는 맥아더가 물러난 뒤 결국 전황이 진행되면서 축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주 문제가 있는 전쟁 수행의 방법이었다. 맥아더의 요청대로 미군과 대만군을 증파해서 바로 제 5차전역의 실패 같은 결정적 승기(勝機)를 잡아서 적을 붕괴시키고 그대로 북진하여 평양을 포함한 거대한 포위망을 한반도 서부에 형성해서 대섬멸전을 했더라면 휴전의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의 통일 문제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휴전으로 조기 종전을 했더라면 그 뒤의 한국 전쟁에서 수없이 발생했던 남북 양쪽,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인명 살상을 방지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워싱턴의 책상물림들이 맥아더의 안을 거부 했던 것은 미국에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맥아더가 구상했던 중공군의 대섬멸없이 전쟁을 끝낸 미적지근한 한국 전쟁의 결론으로 미국은 두고두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3국이 보았을 때 한국 전쟁은 중국이 이긴 전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가난한 빈국이 강국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중국이 증명해 보인 전쟁이었다전쟁 기간 중국군의 전사자가 미군 전사자보다 열배나 많았던 것은 그들이 대단치 않게 건너 뛰는 요소이다. 그 뒤 동서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에서 얻은 프리미엄은 중국을 제3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도와주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졸전을 한 것으로 비쳐진 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막대한 비용을 그 뒤 20여 년의 세월을 두고 지불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의 신생국들은 중국을 스승으로 모시고 때로는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미의 길을 걸었다. 이들 친공 사회주의 국가의 벌떼 같은 발호는 거의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미국은 이들과 싸우고 중국을 포위하느라 한반도에서 들였던 군비의 수십 배를 지출하고 국력을 낭비했다. 정략(政略)이 전략(戰略)에 끼어들면 그 전략은 엉망이 된다는 군사학의 원칙이 생각나는 미국의 실패한 전쟁 지도가 한국의 분단고착을 가져온 것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2

  • David 2015.06.09 21:07

    정확한 분석 이라 생각 됩니다. 어느 분야 건 간에, 늘 문제가 현장을 모르고, 책상에서 탁상공론 하는게 문제를 만들죠. 또한 상대에 대한 정보 분석의 불충분 함 이 일을 망치게 되고, 새로운 역사의 사실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이호창 2015.12.23 13:22

    야후의 울프독님 정말 좋아했었는데 국방블러그에서 다시 보게 되었네요 정확한 역사인식 판단에 감탄드리며 ..새로운 우리아이들이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게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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