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대학살 - 중공군 대패의 춘계공세 -1-

 

 

 

 

 

1950625 북한의 남한 침공은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북한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퇴로를 차단 당하고 지리멸렬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유엔군과 한국군은 38선까지 와서 일단 정지했지만 다시 진격을 개시해 북한 영내로 진격하였다. 기대할 것은 소련과 중국 밖에 없었던 김일성은 모스크바와 북경에 간부들을 보내 정신없이 원조 구걸에 매달렸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대결했다가 세계 대전이 될 수도 있는 병력 파견을 소련 입장에서는 할 수가 없었고 중국만이 북한에 군사력 지원을 할 입장이었다. 사실 중국의 한국전 참전도 자국에 대한 미군 침공의 불안감에서 태동한 것이었다.

 

2년 간의 긴 내전을통해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쫓고 중국에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운지 일 년도 안 되는 처지에 세계 강국 미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그러나 북한이 무참히 깨진 참담한 몰골이 되어 꼬리를 말아 넣고 달려와서 구조를 요청하자 모택동은 북한을 내주면 다음 단계로 미군이 장개석 부대를 앞세우고 만주 지역을 침공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에 이어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김일성이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자 중국의 주은래 외상은 미국에게 경고를 발하기 시작했다. "38선을 한국군만 넘어오면 우리는 참전하지 않겠다. 그러나 38선을 미군이 넘어오면 우리는 참전하겠다." 미국 외교의 오만함과 무지함은 여기서부터 나타났다. 이것은 중국이 자신들 안보를 위해서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내보인 것인데 미국은 무시로 일관하였다.

 

 

 

주은래 - 한국전쟁 시기의 사진

 

 

그 때 북한군은 완전 붕괴된 오합지졸이었으므로 미군은 병참과 항공 지원만 해주고 한국군만이 북한 땅에 진격했더라도 북한군 섬멸의 승산은 있었다. 미국이 중국과 외교적 대화를 하면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북한군이 완전 구축된 뒤에 미군이 상황을 봐가며 북한 땅에 들어왔으면 중공군은 참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외교적 노력에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한국전이 끝나고 제네바에서 한국전 참전 국가사이에 회담이 있을 때도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수 많은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 외상 주은래가 내미는 악수를 뿌리치는 어린이 같은 짓을 했다영국의 애트리 노동당 정부가 중국의 실체를 인정하고 수교를 한 것과 비교하면 한 수 아래의 외교 감각이었다. 미국은 60년대에 들어와서야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중국 대사와 미국 대사 사이의 만남을 정례화해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대화가 10년 만 빨랐어도 한국의 미래는 물론 미국, 중국의 미래도 달라졌을 것이다.

 

1951101일 한국군과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자 중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참전 결정에 모택동은 사흘간 잠을 자지 않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왕 싸울 것이라면 남의 땅에서 싸우자라는 원칙으로 결정을 내리고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소위 30만 명의 항미 원조 지원군[抗美援朝 志願軍]을 구성해 압록강을 건너 침투시키기 시작했다물론 눈 감고 아웅 하기 식이지만 전원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의용군이라는 정치적인 분칠을 한 것은 물론이다. 중국은 미국과 국가 대 국가로 격돌하지 않는다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미군이 주도했던 유엔군 전략은 큰 문제점을 노출했다. 한반도 서쪽을 담당해 북상한 워커가 지휘하던 8군과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진격하던 아먼드 장군 지휘 미 10군단 사이의 산악지대에 80킬로라는 폭을 가진 텅텅 빈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 속으로 중공군은 들어와 은폐해 버렸다미군이 아무리 공중 정찰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중공군은 절대로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무장이 빈약했던 중공 군이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을 기습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준비하고 매복하고 기다렸다.

 

중공군은 방심한 상태로 북쪽으로 올라온 한국군과 미군을 운산-온정리-희천 선에서 야간 기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타격을 입은 유엔군은 청천강 선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봤다. 이것이 중공군이 말하는 제1차 전역[一次 戰役]이었다병참에 한계가 있었던 중공군은 미군에게 한방 먹이고 보급품이 다하자 산속으로 잠입해 버렸다. 유엔군은 한 달 가까이 공중 정찰한 결과 한국전에 투입한 중공군은 단지 5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잘못 판단하고 1125일 다시 총 공세 작전을 폈다. 중공군은 덕천-개천-군우리 선에서 잠복했다가 한국군과 미군을 기습해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이것이 중공군이 말하는 제2차 전역[二次 戰役]이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3

  • Favicon of http://7xx.org 칠성 2015.05.12 15:02

    미국 정부의 정책이라기보다는 극동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독단이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맥아더의 충실한 딸랑이 아몬드가 10군단으로 인천상륙 후 원산 상륙 작전하겠다고 시간 쓰고 또 중공군 개입을 알면서도 무시했죠.

  • 울프 독 2015.05.13 11:04

    아 딸랭이가 많이 망쳐놓았죠. 우리 8사단이 횡성에서 붕괴되어 버린것도 이 딸랭이 덕분이었습니다. 흥남 철수 작전도 민간인 승선을 반대하다가 한국군이 강하게 반발하자 맥아더 사령부에 문의해보고서야 실행했는데 그가 피난민 구조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됩니다.

  • 팔성 2016.04.25 17:42

    처음에 대륙중국에게 유화책을 보인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애치슨 라인 선포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적대할 의도가 없음을 내비췄었죠. 어차피 중공의 "한국군 단독 북진시의 불참"은 그냥 핑계였습니다. 당시 모택동의 최고부하중 하나인 주덕은 한사코 전쟁참여를 반대했는데, 그 절충안으로 주은래가 들고나온 스로건이지, 결과적으로는 미군없는 한국군의 단독작전이 불가능했으므로 결국 불가능한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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