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3-





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3-



미군정이 끝나고 체포의 위협이 없어지자 지하에서 도망다니던 와타나베는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1956년도에 일본 시사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자기의 도피기를 기고하며 저지른 범죄를 호도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이 글의 제목은 “나는 미국에게 심판 당하기 싫었다.”였다


심판 주체의 국적을 떠나서 와타나베가 저지른 범죄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파괴하는 짐승의 짓이었다. 일본 굴지의 잡지가 그를 소개한 것은 일본인의 미개함과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와타나베는 생명 보험회사의 세일즈맨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다. 와타나베가 불린 재산 규모는 상당히 커서 그는 도쿄에 150만 불의 고급 맨션을 소유했었고 호주에 콘도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 성화 주자로서 잠페리니가 선발되어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미국 CBS의 ‘추적 60 분'팀이 와타나베를 찾아와 도쿄 오타니 호텔에서 인터뷰를 하였다. 그 인터뷰에서 와타나베는 포로들을 학대했던 것은 인정했지만 그의 잘못은 사과하지 않았었다.


“내가 포로들을 군의 명령으로서 학대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신조에 따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적(敵)인 포로들은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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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맡기고 항복한 포로가 어찌 적이 될 수 있으며 항거불능인 그들을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논리는 세상을 달관하고 살아야 하는 늙은이로서 해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인간은 늙어서까지새디스트의 병든 심리를 껴안고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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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잠페리니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잠페리니는 포로 수용소에서 태평양 전쟁중 콜세어 조종사로 일본기 26기를 격추한 미 해병 항공대의 최고 에이스 그레고리 파피 보잉튼 소령과 같이 생활하였었다.


 재일 동포 미야비가 분한 와타나베



보잉튼 소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잠페리니와 이태리 음식 이야기를 나누며 허기를 달랬는데 잠페리니는 이태리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글로 써서 벽에 붙여 놓아 포로들로 하여금 열악한 포로수용소 음식과 배고픈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곤 했다고 회상하였다.


잠페리니가 추락하여 행방이 묘연해지자 미군 당국은 그를 해상 실종자로 분류했다가 실종된지 1년 하고도 하루 만에 다시 그를 전사자로 재분류했었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미국은 민군 일체로 그를 살아 돌아온 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잠페리니



전후 1946년 잠페리니는 신시아 애플화이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진주만 피습 50주년 때는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토렌스 비행장이 잠페리니 비행장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 밖에도 그의 이름을 딴 여러 곳이 있는데 그의 모교 남가주 대학은 육상 경기장에 들어가는 입구의 광장을 잠페리니 광장으로 명명했다.


2003년 미국 기독교 방송에 출연한 잠페리니는 귀국 후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복수심에 가득 찬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포로 감시원을 목을 조르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바로 와타나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포로 수용소 시절의 악몽을 잊기 위해서 주야장 술을 퍼 마시는 폭주가가 되어갔다.

 

그러던 잠페리니는 부인의 권유로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빌리 그래험 목사의 영적 설교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자기를 학대했던 감시원들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서야 밤마다 나타나던 포로 시절의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1950년 10월에는 일본 전범 수용소 스가모 형무소를 방문해서 그의 전 포로 감시원들을 만나 이들을 포옹하고 자기는 다 잊었으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달래 주었다. 이들 감시원들 중에 잠페리니의의 포용에 감동하여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잠페리니는 그의 81세가 되는 생일 나흘 전인 1998년 1월, 일본 나가노 현에서 열리는 성화 전달 마라톤에서 한 구간을 뛰었다. 그가 뛴 구간은 그가 감금되어 있었던 나오에쓰 포로 수용소에서 별로 멀지가 않은 곳이었다.


잠페리니는 일본 방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학대했었던 포로 감시원 와타나베 무쓰히로를 만나기를 희망했으나 와타나베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잠페리니와의 만남을 거부한 말년의 와타나베


잠페리니의 부인 신시아는 2003년도에 영면했다. 잠페리니는 재혼하지 않고 살다가 2014년 7월 2일, 로스 엔젤레스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잠페리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언브로큰'이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일본을 방문한 잠페리니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와타나베는 그 보다 앞선 2003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안젤리나 졸리의 영화 ‘언브로큰‘은 당시의 포로 학대 사실을 과장없이 모두 밝히고 있다. 영화 언브로큰에서 악질 와타나베의 역할을 했던 배우는 락 가수인 미야비[예명:본명 石原 貴雅]였다. 조부모가 제주도 출신인 그는 재일교포 3세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시작하자 일본의 철없는 극우파들이 난리법석을 부렸다. 일본인의 잔인성이 과장되고 거짓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인한 와타나베 역할을 했던 미야비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조선인은 일본을 떠나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미야비가 분한 와타나베


이것을 보고 나는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의 농간에 의해서 포로 학대의 전면에 내세워져 악역을 맡아하고 전후 연합군에게 처형당한 조선인들의 억울한 운명이 어쩌면 이렇게 시니컬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가하는 한탄스런 생각이 들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기습적으로 동남아 쪽으로 진공한 일본은 많은 백인 군민을 포로로 붙잡아서 급조한 수용소에 가두었다. 미국, 영국, 네델란드, 호주, 뉴질랜드 국적의 여성이나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있는 민간인들은 당연히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했었는데도 일본은 이들을 인질로 붙잡아두고 수용소에 계속 억류하였다.


일본은 유럽인 포로들을 관리할 포로 수용소 감시인들을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 선발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쟁 후 문제가 될 만한 여지를 타민족에게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교활한 짓을 했을 이유도 충분히 있으리라.


일본이 내건 보수도 상당히 높았었다. 신문에 군속 모집 광고가 나자 당시 취업에 어려움을 겪던 많은 조선인

고학력자들이 이에 응시하고 선발되어 남방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 간부들이 시키는대로 갖은 궂은 일을 하다가 포로를 학대하는 실수도 해야했는데 전후 이들은 연합군에게 전범으로 체포되어 일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본 민족이 당했어야 했었을 비극을 우리 민족이 대신 당한 것이다.


이번 ‘언브로큰’ 영화에 대한 일본 우익의 난동은 엉뚱하기 짝이 없다. 재일 동포 미야비는 단지 영화 속에서 포로를 학대하는 악질 연기만을 했을 따름이다.


 

미야비는 한국인임을 밝혔었고 한국도 자주 방문한 락 가수다. 

일본에서 인기도 높아 일년 스케줄이 꽉 찬 가수다.



그가 단지 연기만 했던 이유로 일본인들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사실이 태평양 전쟁시 선배 동포 포로 감시원들의 기구한 운명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리라. 일본 우익들은 억지 발광을 하며 동포를 괴롭히지만 한국인들중에는 미야비에게 이렇게 나무라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분도 있을지 모른다고 믿는다.


“하필 들개만도 못한 짓을 한 왜놈의 역할을 해주고 그런 수모를 당하고 있나?”고.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1

  • 팔성 2016.04.25 18:03

    일본입장에서는 확실한 자기편으로 분류되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일을 맡기고 싶었을 겁니다. 만주국에서 사람을 뽑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주국이나 중국의 한간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못믿겠다는 거죠. 뭐 지금도 많잖습니까? 일본의 통치가 좋았었다는 식으로 찬양하는 인간들도 쏠쏠히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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