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5-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5-


11월 27일 새벽 2 시경 진양군 미천면 효자동 뒷산을 거쳐 산청군 신등면과 생비량면 경계를 통과하던 이영회 직접 지휘의 소부대는 이곳에 매복했던 서남지구 전투 사령부 2연대 소속 경찰 수색대에 발견되었다.


 [전쟁 후반부 요소요소에 설치 완료 된 초소들 

전투 경찰의 조밀한 초소 배치는 공비들의 활동을 극히 제약했었다.]



매복했었던 요원은 수색대 2소대 1 분대장 김건중 경사와 2 분대장 조옥룡, 양희근 순경등이었다. 첨병이 수하하자 “군인이 무슨 암호야?!”하고 응답하므로 수상히 여긴 매복조들은 즉시 집중 사격을 가했다.


공비들은 사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영회를 포함한 9명이 이곳에서 사살되고 총상을 입은 박종상 등 4 명은 생포되었다. 


이영회는 의령 경찰서장 박영동 서장의 가죽 점퍼를 입고 승마 바지와 비슷한 당꼬 바지에 가죽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런 차림에 긴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공비치고는 상당한 럭셔리 옷차림이었다.


그는 역시 박영동 서장의 소유였던 로렉스 시계를 포함해서 십 여 개의 약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영회 부대의 한 명은 귀순했다고 하는데 전투 전에 귀순했는지 전투 후에 귀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비 최강 부대인 이영회 부대는 부대의 중심이던 그가 죽자 허망하게 멸망했다.


이영회가 죽고 남은 잔당들은 부하 이춘봉이 거두어서 진양군 집현산과 합천군 황매산에 잠입했으나 이미 앞날이 암울한 상황에서 이들 잔당 공비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져 강원영이 이춘봉을 사살하고 잔당을 이끌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서 의령 경찰서 피습 8일 만인 12월 1일 새벽에 토벌 작전은 종결되었다.


이 의령 경찰서 습격사견에서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고 두 명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 공비들의 피해는 이영회를 비롯한 18명이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되었다.


그의 잔당들은 자수하거나 이영호의 후계자로 알려진 서울 공대 출신 노영호를 두목으로 재편되어 공비 활동을 하다가 다음해 산청군 삼장면에서 노영호 이하 모두 사살되었다.


이로서 최강 공비부대 이영회 부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이영회가 맘 먹고 감행했던 의령 경찰서 장거리 기습 사건은 그의 최후와 부대 붕괴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앞서 언급한 참전 경찰 경우회 사무총장 김을로씨는 이때 산청 경찰서 사찰계 차석으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영회 출현 급보를 받자 매복조를 인솔하고 출동하였다.


이영회와 같은 14연대 하사관이었던 공비 두목 송관일을 사살하고 경사로 특진했었던 김을로 씨는 갑자기 출동 명령을 받았는데 내심 이 매복 출동이 너무 싫었었고 공포심이 일었다고 한다. 


이미 가족도 있고 경찰의 출세 가도에 서서 잘 나가고 있던 그는 내면에 있던 이영회 부대에 대한 공포가 살아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영회 부대는 김을로 씨 매복 지점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안도했었는데 다음날 산청군 신안면 지서에서 연락이 왔다. 이영회의 사체는 이곳으로 운반되어 왔었다.


그 곳에 근무하는 동료가 빨리 오라고 불렀었다.그는 ‘야! 이영회가 너하고 꼭 같이 닮았다. 한 번 와 봐라.”해서 궁금증에 달려가 보니 지서에 서전사[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사령관 김종원은 물론 수많은 간부들이 와있었다.


이들이 다 떠난 뒤에 김을로씨는 신안 지서에서 100미터 떨어져 흐르는 경호강을 가로 지르는 긴 다리 입구에 방치 된 이영회의 사체를 보러 갔었다. 이영회는 아직도 박영동 의령 경찰서장의 가죽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영회 사체 얼굴은 출혈을 많이해서 창백했지만 김을로 총장이 보아도 자기 얼굴과 너무 닯았었다고 한다. 


그 뒤에 김을로씨는 동료들로부터 죽은 이영회는 가짜고 진짜 이영회는 김을로라는 가명으로 경찰에 잠입한 것이 틀림없다는 놀림을 내내 받았다고 한다.



[올해 88세의 김을로 총장

자기가 봐도 죽은 이영회와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은  60-70%쯤 닮아 있었다고 말한다.]



이영회의 또 다른 일화 하나다. 


이현상을 비롯한 공비 두목들이 모두 산중처[山中妻]라는 내연관계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영회에게도 이영순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태씨는 그의 저서 남부군에서 이 여인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이영회와 이영순의 애정 행각이 너무 진했던가 주변에서 빈정대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자 이영회는 슬픈 표정으로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풍찬 노숙, 사람답게 살아 본 적이 하루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 뻔하다.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위 스무 살이라는 말은 거짓이거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은 여러 작가들에게 상당히 감상적으로 들렸던가 ---- 이 글 저 글에 인용한 것이 보인다. 그 이영순 여인에 대한 후기가 남부군과 같이 쌍벽을 이루는 지리산 공비 다큐멘타리의 걸작 ‘ 실록 정순덕’에 나온다.

 

이현상은 휴전 직후 자기 아기를 밴 하수복 이하 간부들의 산중처들을 모두 산을 내려가 귀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현상의 본부인 최문기는 자식들을 데리고 모두 월북했다. 위의 사진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으로 북한 외무성 간부였다. 하수복과 사이의 태어난 남한 유복자는 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30여 명의 여성들과 같이 하산한 이영순은 덕분에 산속에서 죽은 귀신이 되지 않고 오래 살았었다. 1980년대 말에 작가 정충제 씨가 이 사람을 취재하려고 시도했었다. 이영순은 두 명의 자식을 둔 평범한 여성으로 부산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자 공비 포로들. 카메라를 쏘아보는 선머스마같은 여자 공비에 비해 오른쪽에 만사 체념한 표정의 여자 공비는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하다. 공비 간부가 눈독을 들일만한 용모다.]



삶의 방편으로 다방 마담을 한다고 했지만 60이 다 된 나이로 고용 마담을 했을리는 없고 생계를 위해 다방을 경영하는 주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녀는 정충제씨의 면담 신청을 한사코 거절해서 정충제씨는 빈손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해방후 전국의 젊은이 사이에 만연되었던 붉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입산 빨치산의 길을 갔다가 전사 등의 불행한 인생으로 끝을 맺은 여성들이 무수히 많았었다.


제주도의 목사 따님으로 간호사가 근무하던 중 입원한 여순 반란사건 괴수 김지회와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경순의 인생을 보면 이영순의 삶은 그런대도 행복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한국 역사에 한 악역의 얼룩진 흔적만 남기고 암흑 속으로 사라진 이영회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은 전투 경찰사에 관계하는 나로서는 일말의 유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끝>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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