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공[警空]공지 합동작전 - 1951년 -2-

 

 

 

 

 

 

한국 공군의 무스탕들이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를 폭격하는 상상화

 

 

백 경위는 조종사에게 진양군 오석면을 경유 산청군 신안면 원지 상공으로 비행하도록 부탁했다. 백 경위가 뒤를 돌아보니 김신 대령의 전투기들도 빈틈없이 뒤따라 오는 것을 확인하였다정찰기는 100m의 저공으로 날았다. 정찰기가 예정대로 계속 날아 단성면 상공에 진입해 운리 입석 부락 앞 도로 상공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이 도로를 그대로 따라 올라가면 공비들의 표면 활동이 극심한 달뜨기 산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

   

돌연 소총탄 7,8발이 기체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백 경위는 적탄이다!” 외치며 밑을 내려다보니 도로변 산기슭에 숨어있던 공비들이 우글거리며 정찰기에 대공사격을 하고 있었다. 백 경위는 즉시 권총을 꺼내 지상의 공비 위치에 신호탄을 한 방 쐈다. 동시에 정찰기는 기수를 들고 높이 급상승하였다. 목표에 맞아 흰 연기를 뿜는 신호탄을 본 전투기 세 대는 급강하 하면서 기총 소사를 했다기총소사는 공비들이 모두 숲속으로 도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백 경위는 안전한 400m 상공에서 다른 목표를 찾았다. 주변 골짜기를 정찰하니 입석 부락 뒷산 능선에서 시천면으로 가는 산길 쪽에 수십 트럭 분의 장작이 쌓여 있는 큰 더미 속에 공비 다수가 대피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그 곳으로 재차 신호탄 2발을 발사하니 지휘기가 즉시 급강하 기총공격을 가하면서 뒤따른 두 기의 전투기들도 이곳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공격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장작더미가 어지럽게 튀어 오르고 쓰러지는 공비들이 부지기수였다. 세 대의 전투기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 달뜨기 산과 운석봉 골짜기 일대를 누비며 수상한 곳에 수색 사격을 가해 단성면을 공격하기 위해서 집결했던 공비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무스탕기

 

 

첫 날의 기습적인 공격 뒤에도 전투기 편대는 연 3일간 공비 출몰지역인 단성면, 삼장면, 시천면 등지의 지리산록과 운석봉 주위에 수 만매의 자수 권유 삐라를 뿌렸다삐라의 대량 살포 뒤에 이 삐라를 가지고 투항하는 공비들이 많았던 것도 백 경위의 큰 보람이었다첫 날 공비들을 타격했었던 공습으로 단성을 구제하고 적의 진주 침공 의도를 격멸한 것은 건국 후 공지 전투의 한 역사를 쓴 것이었다. 그 후에도 백 경위는 공비 토벌 경계에 몰두하였다.

 

시간이 두어 달 지나 트럭 피습 사건이 있었다. 6.25동란과 함께 징발해서 산청서에서 인계받아 병력 수송용으로 사용하던 강원도 모 광산 소속 덤프 트럭이 19517월 초순경에 산청-진주간 도로 중간인 산청군 신안면 심곡에서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차량은 불 태워지고 운전수는 납치되어 산속으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사건 후 경찰에서 도로 경비를 강화했으나 운전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8월 원대 복귀했다가 다시 이동해 온 사천 공군기지의 김신 대령을 찾아가 적정 보고를 했더니 김 대령은 백 경위에게 잠시 기지에서 대기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홀홀단신 출격하였다. 한참 뒤에 돌아온 그는 백 경위에게 빨리 귀서해서 운석봉의 삼장면 쪽 산골짜기에 정찰대를 파견하여 그 결과를 통보해달라고 했다김 대령은 전투기를 몰고 지리산 노고단 상공까지 갔다가 다시 귀환하던 길에 삼장면 대원사를 지나 운석봉의 산정을 통과할 때 문득 산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니 골짜기 중간 지점에 천막같은 이상한 물체가 보였지만 신등면까지 그냥 날아가다가 아무래도 그 천막이 마음에 걸려 기수를 180회전하여 뒤돌아가서 천막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결과 확실히 공비의 시설물로 판단이 되어 500파운드 폭탄 두 발을 투하했다백 경위는 그 곳이 삼장면 딱바실 골짜기로서 공비들의 거점 근거지라고 알려 주고 산청 경찰서로 귀서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유복문 서장에게 보고하고 간부들과 협의한바 다음날 아침에 폭격 확인 정찰대를 파견하기로 방침이 섰다그러나 다음날 새벽 3시에 며칠 전에 납치되었던 트럭 운전수가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고 경찰서 정문에 들어왔다. 등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즉시 병원으로 데리고 가 응급 치료와 동시 탈출해 나온 경위를 물었다.

 

그는 납치된 후 공비들에게 끌려 삼장면 딱바실 골짜기에 거점을 둔 공비들 경남도당 본부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며 갖가지 고초를 당하고 왔다는 것이다김신 대령이 출격한 어제 오후 2시경, 75명 가량의 공비들과 식사를 했는데 공비들이 아래 계곡 옹달샘에서 물을 받아 오라기에 아래로 내려가 돌틈에서 졸졸 흐르는 물을 받고 있을 때 이미 지나갔던 전투기가 다시 되돌아와서 폭탄 두 발을 투하했다. 폭발 순간 운전수는 그 자리에 엎드렸으나 등에 파편을 맞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통증이 심하였지만 근처 숲속에 숨어버렸다.

   

천막이 있던 일대는 두 개의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주변 불탄 나무들에는 찢어진 옷가지와 시체 조각 등으로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밤이 되자 운전수는 그 곳을 탈출해 달뜨기 산을 넘고 걷고 걸어 겨우 본서로 귀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운전수로부터 폭격을 당한 공비들이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정보를 얻은 백 경위는 정찰대 파견을 취소하고 오전 8시경에 사천 공군 기지로 갔다폭격의 결과를 김신 대령과 미 고문관에게 알려준바 양인은 물론 조종사들 모두가 희색이 만면하여 기뻐하였다.

 

일고 보니 폭격에 떼죽음 당한 공비들은 산청-진주간 도로와 도로 인근 부락을 상습적으로 털던 떼도둑 공비들이었다지리산 지역 공비 소탕에 전투기가 동원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951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병력 파견에 여력을 얻은 군은 백선엽 장군을 사령관으로 백 야전 사령부를 구성하고 휘하에 수도 사단과 8사단을 배속시켜 석달 반동안 대공세를 취해 서남 지구 공비들의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이 때도 강릉기지에 전개했었던 한국 공군의 무스탕 대대가 사천 비행장으로 날아와 토벌을 지원하였다그러나 산청 경찰서 지원 업무는 당시 공군이 작전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 때는 한국 공군이 미국의 딘 헤스 소령이 지도하는 바우트-1[BOUT-1]이라는 훈련 계획명에 의해서 조종사들이 맹렬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한국 공군의 전투 출격은 몇 개월 뒤인 518월부터 실시되었다. 비록 4기지만 베테랑 조종사들이 이끄는 전투기대가 경찰과 드문 공지 합동작전을 했다는 것은 전투 경찰사나 공군 전사에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한국 공군 육성의 기여자였던 딘 헤스 소령과 고아의 어머니 황온순 여사. 헤스 소령은 고아들 1000명을 제주도로 공중 수송하는 공로를 세웠다.

 

 


P.S 사족이지만 이태 선생의 남부군에 공비들이 최초의 F-51 무스탕 공격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습은 미공군의 F-51들이 가한 것이다.

 

- 어느날 우리는  전에 없던 강력한 토벌군의 습격을 받아 쫓기고 쫓긴 끝에 원통산 줄기에 이르렀다.  등성에서 오랫만에 회문봉이 바라 보였다. 때마침 회문봉은 항공기의 총폭격을 받고 연기 속에 몸을 떨고 있었다. 몇대의 무스탕기가 빙빙돌며 회문봉을 번갈아 강타하는 것이 멀리 바라보였다. 모두들 눈앞의 적을 잠시 잊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우뚝 솟은 한개의 봉우리에 대한 그 폭격은 처참하리 만큼 집요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이윽고 항기가 사라지고 연기가 서서히 걷혔을 때 풀 한 포안남았을 성싶던 회문봉 마루턱에서 철판을 두드려대는  것같은 기관총 소리가 한바탕 울려퍼졌다. 회문봉은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이... -

 

회문봉이 회문산을 말한다면 위의 공습은 1951년 신상묵 경무관이 미군에게 부탁하여 전투기와 전차의 협조를 얻어 가한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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