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의 말춤과 용골대의 조선 급습 -5-

 

 

 

 

 

이런 강화도 요새화 건의가 윤 황이라는 신하로부터 올라왔으나 인조는 우유부단하게 깔아뭉갰다. 인조는 강화도로의 피난이 위험해지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는데 그때 그를 따라 한양과 경기도 감영의 병력 12,000명이 같이 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는 단지 한 달 분의 군량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이 부대와 군량이 강화도로 갔더라면 저항을 휠씬 끈질기고 길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조가 47일간 피신해 있었던 남한산성 행궁

 

 

침공한 청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참으로 이상적인 처신을 해준 것이라 하겠다. 조선의 수뇌부들이 좁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집결해 주었으니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급속 남하한 청군의 습격이 있을지 모른다고 겁먹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부터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다음날 인조는 주변의 권유로 다음날 강화도로의 탈출을 다시 시도했다그 때 청군이 몰려오기 전이라 남한산성 주변의 적정(敵情)은 경미했다.

 

인조는 새벽에 길을 떠났지만 그날 눈이 오고 길이 미끄러웠다. 왕이 탄 말이 미끄러지고 쓰러지자 그는 할 수없이 눈길을 한참 힘들게 걸어 가다가 돌아와 버렸다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팔다리가 부러져도 강화도로 탈출했어야 했는데 고생을 안 해 봐서인지 조금의 불편함도 못 견디는 듯했다.

 

후에 성에 돌아온 것은 청군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해서라고 했지만 그때 비상 상황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나중에 김 류, 이성구 등의 신하들이 그에게 군대 지휘력이 있는 장수 10여 명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가 강화도나 남으로 가서 전쟁 지도를 하라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렸었다하지만 인조는 신하들을 두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나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이런 건의를 외면하였다.

 

말도 아닌 소리였다. 탈출하는 일이 겁이 나고 그 고생을 감내할 일이 싫었기 때문이리라남한산성이 포위 된 뒤에 팔도의 군사들이 한양 주변으로 몰려 왔지만 통일된 핵심 지휘부가 없으니 대체로 사생결단하고 싸우려는 부대가 드물었다.

 

 

 

 

남한산성 남문

 

 

인조가 목숨을 걸고 남한산성을 탈출해 이들 8도군을 통합 지휘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고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가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피해도 적었을 것이다조선이 청에게 굴복하고 백성들에게 뿌린 유시(諭示)에서는 한심한 자기 변명으로 일관했는데 나약한 것은 둘째 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배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다. 남한산성이 원체가 천험의 요새였던지라 청나라 군대는 포를 끌어다가 계속 포격을 했지만 좀체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날씨는 굉장히 추웠고 성내의 식량은 거의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청은 대신 강화도 공격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강화도에도 봉림대군 등의 왕자들과 왕세손을 비롯해 여러 중신들이 있었다. 방어사령관은 영의정 김 류의 아들 김경징이었다. 그는 아버지 덕에 서울 시장격인 한양 판윤 벼슬을 하다가 김 류가 가족들과 재산을 강화도로 도피시키기 위해서 인조에게 추천한 덕에 강화도 수비 사령관에 지명되었다.

 

김경징은 군사적 재능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방어 병사가 단지 1,000명밖에 없는데도 강화도 해협을 막강한 방어선으로 믿어 버리고 술만 마셔댔다. 청군은 강화도 공격의 전략을 준비해왔다. 그들은 심양에서부터 다수의 목수를 데리고 와서 김포 일대의 민가를 부수고 얻은 목재로 작은 배들을 무수히 만들었고 한강과 임진강 일대 해안을 수색해 어선 다수를 징발하였다그들은 블랑기라는 명군에게서 노획한 포 다수를 갑곶진 해안에 설치하고 출동한 조선 수군 판옥선을 공격했다.

 

 

 

블랑기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한 청군의 공격은 강화해협 도하 두시간만에 강화성을 점령하는 성공을 가져왔다. 강화성을 점령한 병사들의 대부분이 몽골병이었다. 그들은 무참하게 강화도 일대에서 약탈과 부녀자 능욕을 저질렀다김경징은 재빨리 배를 타고 도망치고 10여 명의 사대부 가문 여인들이 난행당하기 전에 목을 매고 죽었고 여러 중신들이 폭약으로 자결했다. 자결을 한 사람 중에 삼학사로 유명한 김상헌의 형 김상용도 있었다. 왕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김경징이 내동댕이치고 도망친 김 류의 어머니, , 그리고 며느리는 능욕을 당하기 전에 자결을 하여 이들을 기리는 사당을 현재의 안산시에 남겼다.

 

 

 

며느리들의 집단 자살을 추도하는 사세 충렬문

 

 

 

김경징도 나중에 강화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참형을 당했다남한산성의 인조는 강화 섬이 함락되고 열흘을 못 버틴 1637130, 지금 한강변인 삼전도에 내려와 진흙 땅 위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이마로 아홉 번 땅을 찍는 굴욕적인 삼궤구고[三軌九臯]를 하고 무조건 항복을 했다.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 비

 

 

12월 초 용골대와 마부대의 전격전식 기동 개시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조선의 인조가 130일 한강가 삼전도에서 볼썽 사나운 항복 의식을 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두 달도 걸리지 않은 최단기에 최악의 형태로 당한 패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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