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의 말춤과 용골대의 조선 급습 -4-

 

 

 

조선의 천대와 위협을 느낀 이들이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돌아가 청 태종에게 얼마나 악의와 결의에 차서 조선 정벌을 건의했는지 알만하다한편 명을 만주에서 내쫓아 버리고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자랑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청을 화나게 해놓고도 인조는 결정적으로 천치 같은 짓을 했다8도의 관찰사들에게 비밀 교시를 내려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 굴욕적으로 맺은 형제의 맹약을 무효화 한다고 했다. 이 비밀 교시가 고스란히 청에 들어가고 말았다.

 

청의 태도가 험악해져가자 인조는 역관을 청에 보내 사태를 정탐해오라고 지시했다. 청 태종은 인조에게 답서를 주고 1115일까지 심양에 왕자와 대신을 보내 정묘호란 때 맺은 화의를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청 태종 - 누르하치의 아들

 

 

그때 인조에게 보낸 청의 답서를 보면 청군의 군사적 목표와 작전이 확실히 들어난다.

 

"귀국이 많은 산성을 쌓고 있지만 우리는 큰길을 따라 바로 진격을 할 것이오. 그렇다면 그 산성으로 우리를 막아낼 수 있겠소? 귀국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오직 강화도뿐인데 만약 내가 조선의 8도를 다 유린한다면 그 작은 섬 하나를 가지고 어찌 나라라 말할 수 있겠소?"

 

한마디로 하자면 청군이 군사를 일으키면 산성 따위는 무시하고 곧 바로 강화도를 목표로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이 때 조선이 동작 빠르게 사신이나 왕자를 보내고 비루하지만 꼬리를 땅에 붙이고 싹싹 비는 연기를 했으면 청의 공격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왕자 정도는 인질로 잡혀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 태종의 최후 통첩 형태의 협박장을 받고도 무능했던 인조와 신하들은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며 우물쭈물했다.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지켜보던 청은 드디어 조선 침공의 군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에서 어이없는 수모와 위협을 당한 악에 받쳐 용골대와 마부대는 청 태종이 답서에서 자신만만하게 밝힌 그대로를 실천했다. 바로 이해가 병자년이었다. 나는 조선의 조야에 분수를 모르고 청을 배척하는 기운이 팽배했던 이유 모를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인조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런 전쟁을 불러왔던 것은 인조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뒤 남한산성 포위와 그 뒤에 행한 인조의 행동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위기의 군주다운 단호하고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해서 부하들에게 끌려가며 암둔(闇鈍)하고 용렬한 처신을 해대다가 사태를 최악으로 몰아갔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그가 광해군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강하게 후금 경계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더라면 세상 물정모르는 조야(朝野)가 그렇게까지 초여름 개구리 울 듯 친명배청의 의견들을 뱉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앞에서 이야기 하다가 말을 돌린 시점으로 돌린다. 용골대의 기습에 놀란 조선은 급조한 80명의 반격 부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서울 북방 고양에서 어설프게 기습을 시도했다가 전멸 당했다. 적군 3,000명의 번개같은 기습에 조선 조정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의 청군 병력은 불과 수천 기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때 조선이 정확하게 정찰을 실시하고 치밀한 전술로 다부지게 기습해서 침략 청병을 초전 박살을 냈다면 병자호란의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조선 조정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공황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미 승패는 끝이 나고 있었다. 북한군 탱크 두 대와 일개 소대의 서울 시내 침입으로 서울의 방어선이 붕괴했던 6.25사변의 비극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조정은 입에 거품을 물고 피난에 몰두했다. 인조는 당연히 강화도로 피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조는 가는 도중 남하한 적에게 피습당할 염려가 있다고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이 중요한 시점에 취한 인조의 행태를 보면 그가 무척 겁이 많고 심지가 굳지가 않다는 것이 들어난다. 자신은 맏 아들 소현 세자와 함께 철옹성같이 보이는 남한산성으로 가면서 다른 궁궐 식구들은 모두 강화도로 보냈다.

 

 

 

 

강화도의 옛 지도

 

 

강화도 행렬에 신하들의 가족들이 합세해 대단한 숫자가 되었다. 자기는 위험해서 못 가겠다는 강화도에 다른 혈족들을 보낸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이들은 청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했다. 인조의 아주 잘못된 결정인 남한산성행은 겁 많은 그의 기우(杞憂)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광해군과 달리 그는 청나라가 얼마나 강한지도 몰랐고 청의 용골대가 천대를 받고 청으로 도주한 뒤에 청 태종으로부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받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뒤에도 청병(淸兵)을 공격하기 위한 거국적인 작전 지휘를 위해서 적극적인 남한산성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인조는 만사 제치고 강화도로 갔어야 했다. 적이 한강을 도강해서 강화도 길을 차단했더라도 이를 회피해서라도 악착같이 강화도로 피신해야 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그때 청병의 습격 가능성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강화도는 완전 포위가 가능했던 남한산성보다 훨씬 넓고 장기전의 경우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배를 이용하여서 외부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을 뿐 더러 조선 팔도에 작전 지시를 내릴 수가 있었고 유사시 배를 이용해서 탈출도 가능했다. 땅이 넓고 바다로 전국 어디와도 통할 수가 있어 보급과 작전 지시가 남한산성보다 열배는 나은 곳이었다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던 가을부터 강화도에 한양으로 운반하는 세곡을 일부 저장하고 군대 3-4만을 주둔시키고서 바다 해변을 따라 요새를 구축했더라면 강화도나 남한산성의 비극은 없었으리라고 본다.

 

 

Trackbacks 0 / Comments 1

  • after 2017.01.21 19:43

    너무나 멍청한 위기대처에 내 가슴만 속터진다. 나의 우리의 선조 조상들이 피흘리는 댓가를 받았지. 지금은 어떠한가 물어본다ㅣ 반대만 목청 터져라 청개구리 짓하는 야당 정치한다는 분들이여...정신차려보자

댓글 남기기

블로그 인기 키워드

Tistory Cumulus Flash tag cloud by requires Flash Player 9 or better.

링크

re_footerlink.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