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의 말춤과 용골대의 조선 급습 -2-

 

 

 

 

 

그 십여년 전으로 올라가 이렇게 된 원인(遠因)부터 슬슬 찾아가 보자. 16233, 광해군 15년 조선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집권층인 대북파에 의해서 권력의 밖으로 내몰리며 차별받던 서인(西人)파의 이귀와 김류 등이 능양군[후에 인조]를 옹립해 왕으로 추대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정변이었다하지만 광해군은 중종반정으로 타도되었던 연산군같은 문제있는 암군(暗君)은 아니었다. 여러 실수가 있었으나 그가 발휘한 외교술은 역대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평가 된다.

 

광해군은 임진란 때 왕세자로서 조정의 별동대 격인 분정(分庭)을 이끌고 각처를 방문하며 전쟁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국가를 전쟁에 말려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북방에 멸시받던 여진족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검은 구름처럼 커지는 것을 보고 광해군이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의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큰 경계심을 가지고 준비를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 - 지모의 화신이라 불리던 후금의 개조

 

 

그는 철기병이라 부르던 후금 기병대에 맞설 것은 조총대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임란 후 고갈된 재정 형편으로 무리했지만 5,000명의 정예 조총부대를 육성하였다후금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던 명나라는 조선에 압력을 엄청나게 가했다.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으니 조선은 응원군을 보내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며 조선이 양성한 조총부대를 포함시키는 추가사항까지 달았다.

 

복잡한 국제 정치 상황과 광해군의 의중을 모르는 신하들은 우리가 대국의 은혜를 입었는데 빨리 도와주자고 광해군을 들 볶았다. 내외로 시달리던 광해군은 할 수없이 조총수 5,000명을 포함한 12,000명의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이 원정군은 만주 사르흐 전투에서 모래 바람이 부는 중에 철기병들에게 기습을 당해 제대로 힘도 못쓰고 대패하고 말았다.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조선 조총병들

 

 

광해군은 부대를 파견할 때 맹장인 무인이 아니라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 스타일의 강홍립을 파견하면서 밀지를 내렸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서 이기는 쪽에 붙어라.”

 

강홍립은 광해군에 지시대로 항복하고 후금 진영에 머무르면서 조선으로 계속 중요한 정보를 보냈다그 뒤에도 철없는 신하들은 명나라의 요청대로 다시 원군을 보내자고 광해군을 졸랐지만 광해군은 냉소로 무시했다. 그런데 그런 대다수의 멍청이 신하들이 존중하던 반명친청의 무드를 이용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국가가 아니라 홀대받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능양군을 받들고 반란을 일으킨 이귀, 김류 등의 서인(西人)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제거한 광해군을 성토하고 자기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철없는 지도자층이 떠들던 친명반청 정책을 택했고 무능한 인조는 이에 줏대없이 따라갔다.

 

그들의 안중에는 광해군이 직시하고 있었던 냉엄한 북방 위협의 현실은 없었고 정반대로 뜬 구름 같은 명분만 있었다이들은 임진왜란 후 한 세대가 지나지도 않은 30년 동안 대국 명을 무섭게 압박하던 청을 여전히 야인들이라고 홀대하다가 두 번이나 침공을 당하고 국가가 초토화되게 만들었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광해군이 그처럼 노심초사해서 조심스럽게 관리했던 청을 철없이 자극했던 무능한 인조와 그 신하들의 행적을 여기 소개한다.

 

그 결과를 분석한다면 인조와 그 일당들은 천치나 다름없었다고 탄식 섞인 비난의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 무능과 무지와 태만의 집합 묘사어인 천치가 인조와 그 주변을 에워 싼 집권 세력을 묘사할 수 있는 최적의 단어이다반정 주체는 쿠데타가 성공하자 평안도 국경 지방으로 금부도사를 보내 평안 감사 박엽과 의주 부윤 정준을 처형했다. 그들은 광해군의 대북 정보 창구였었고 후금 외교 창구였었다.

 

두 사람은 광해군의 의중을 받들어 대외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다두 사람을 전격적으로 처치한 것은 분명 반 후금과 친명 정책을 표방한 인조반정 세력들이 명을 의식한 조처였다실제로 후에 조선과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명군 지휘관들은 이들을 처형한 것에 대해 "통쾌한 일" 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광해군의 뜻을 받은 이들이 명군들의 미움을 받아가면서도 후금에 밀착해 외교 업무와 정보 업무를 얼마나 밀도있게 진행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가공한 군사력을 갖춘 이웃을 자극하고 또 이들을 다룰 외교 루트를 스스로 차단해버리고 정보라인을 폐쇄했으니 도대체 이성을 가진 정치 세력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인조가 대후금 정보 루트를 차단한 것은 위험한 호랑이 옆에서 스스로 눈을 감고 소경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인조 조정 패거리들은 이웃의 강적을 겁 없이 자극하면서도 아무런 군사적 방어 준비는 하지 않아 병자호란 때 적의 바람 같은 기습 남하를 눈 감고 당함으로써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광해군의 몰락 뒤 점점 괘씸해지는 조선의 태도를 보며 후금은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괄의 난 후 후금으로 도주했던 조선 망명인 문제를 두고 조선과 갈등을 빚던 후금이 드디어 16273만 병력으로 국경선을 넘어 의주와 안주 곽산 등을 습격해 단숨에 초토화 시켰다. 잘 알려진 정묘호란이다정주 목사와 곽산 군수와 처첩들은 홍타이치 둘째 왕자 장막에 끌려가 갖은 난행을 당하고 더해서 여진족처럼 변발을 하고 항복했던 두 부사는 부대 이동 때 처첩이 탄 말의 고삐를 잡는 마부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처의 고삐를 잡은 곽산 군수 박유건은 처의 정절을 지키지 못함을 나무랐고 마상의 처는 충의를 지키지 못한 그를 비난하며 서로 말다툼을 해 주변에 구경거리를 제공했다새 정권의 후금 배척 정책에 충실했던 두 변방의 관리들은 후금의 원성을 많이 샀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응징을 당한 것 같다. 제일 전방에 노출 되어서 후금에게 잘 알려진 의주 부윤은 아예 죽여 버렸다.

 

즉위한 뒤 장님처럼 후금을 백안시 했던 인조는 후금의 실력 행사에 놀라 재빨리 강화도로 도주해 눈치를 살폈다그러나 후금군은 한양까지 남하하지는 않고 대신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 인조를 협박했다. 이 때 후금국에 붙잡혀 있던 강홍립이 후금군과 함께 귀국하여 회담 진행을 돕는다. 별다른 군사 실력이 없었던 인조는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과 맹약을 맺는다.

 

 

 

강화도 북쪽의 연미정- 삼전도 굴욕의 예고. 정묘호란 뒤 맹약을 맺은 강화도 연미정. 강화 팔경의 하나로 바다건너 개풍군과 오른쪽으로 한강 어구가 보인다.

 

 


상당히 굴욕적인 맹약이었다. 앞으로 후금에 세폐(歲幣)도 바치고 조선은 후금을 형으로 착실히 모시겠다는 내용이었고 백마를 잡아 피까지 마시면서 한 약속이었다. 실질적인 항복의 회담 타결이었다. 이 조약을 맺은 뒤 후금은 이 정도면 조선의 버르장머리를 충분히 고쳐 주었다고 생각하고 철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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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성 2016.05.10 16:34

    광해군 밀지떡밥은 지금도 회자되죠... 광해군의 중립외교? 근거없습니다. 그냥 강홍립더러 명나라 장수들의 말만 듣지 말라는 지령만 내렸어요. 그리고 중립외교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한쪽선택을 강요받을텐데? 강홍립이 죽을때에 무려 화약통을 깔고 앉아서 몇놈 더 죽이겠다고 별렀고, 김응하는 분전하다 전사했는데, 어느모로 봐도 밀지를 받은 장수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대가 전력의 2/3를 상실합니까? 밀지나 중립외교떡밥은 이제 걷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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