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배 장군의 38선 돌파 전투 - 화천 지촌리 전투 -마지막-

 

 

 

 

 

1중대는 성산 못미처 산 아래에서 적과 조우했다. 북한군은 이 요지에 대규모의 진지 공사를 해놓았다. 그러나 김용배 대대장이 예측했던 대로 이곳에 배치 된 북한군은 소수였다

 

 

 

지도 중간 왼쪽 원안에 1중대가 점령한 성산이 있다.

이곳에서 1중대는 60mm 박격포와 기관총의 불비를 화천읍에 뿌렸다.

 

 

병력을 모두 화천 읍내 방어에 투입하는 소극적 전술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진지공사가 잘 되어 있는 이곳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1중대 단독으로 공격해가자 약 50명 내외의 적은 제대로 대항도 하지 않고 모두 오른쪽 산 아래로 도주하고 말았다. 1중대는 세 명의 포로를 잡았다화천 읍내가 환하게 보이는 성산 정상을 확보하자마자 오른쪽 도로에서 적 1개 중대가 성산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성산 정상이 국군에게 점령당한 것을 알고 4부능선에서 황급히 뒤돌아 내려가고  말았다.

 

1중대는 60mm 박격포들을 거치하고 화천 읍내에 포격을 가했다. 1중대는 다른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험한 산능선을 통한 침투에서도 무거운 박격포 3문과 박격포탄들을 휴대하고 왔다. 박격포는 이번에도 큰 활약을 하였다.

 

 

 

60mm 박격포

 

 

이대위는 화천읍내에서 제법 큰 건물들을 중요한 표적들을 확정하고 포격을 개시했다정확한 정밀 사격보다도 화천 읍을 방어하는 적들에게 공포감을 일으켜 패주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었기 때문에 가급적 여러 곳의 목표를 신속하게 동시에 타격하였다. 여기저기 때리던 포탄이 한 건물에 명중하자 그 곳에서 수십명의 북한군들이 뛰쳐나와 화천 동북쪽 산으로 도주했다. 50발의 포탄을 화천 읍내에 퍼부었다.

 

이때 도망친 북한군 군관이 그간 북한군과 숱한 전투를 하면서도 보지 못했었던 둥근 모자의 정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이대용 장군은 회고한다.

 

 


 

나는 이런 정복이 당시 일선 배치 북한군 야전군에서 볼 수없는 것으로서 이놈들이 모종의 중요한 임무를 띄고 평양에서 급파된 것이 아닌가를 이대용 장군에게 물어보았다 이 장군은 그 가능성에 동의했다김일성이나 전선 사령관 최용건이 이 화천 방어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1중대는 이들에게 중대가 보유한 여러 정의 기관총을 총동원하여 장거리 사격을 가해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북한군이 120mm로 추정되는 대구경 박격포탄들을 쏴 사격을 중단하고 중대원들을 엄폐시키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실 60mm  박격포 3문이 퍼부은 50여 의 포탄이 화천 방어 적군을 대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어 붕괴 시켰다. 19508.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팔공산 방면으로 침투시킨 1개 분대 특공대가 대구시에 일곱 발의 82mm  박격포 사격을 가했다. 이 소수의 박격포탄 사격에 대구시는 대혼란이 빠지고 정부는 대구 철수를 진지하게 검토했었다거기에 비하면 7배나 많은 포탄이 화천읍내의 전역에 낙하하였으니 공포를 느낀 북한군이 무질서하게 도망쳤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60mm 박격포가 거둔 최대의 전과일것이다.

 

 

 

 

화천 버스 터미날 에서 바라본 성산 - 여기서 박격포 사격을 가했다.

 

 

 

성산을 점령했을 때 산 아래에 내려가 춘천으로 전진하던 3중대의 전방 도로에 북한군들이 뒤늦게야 지뢰를 설치하느라 바쁜 것을 보았다. 이것은 어제 복고개 능선에서 쫓겨난 북한군이 아직도 국군의 빠른 기습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늦장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중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화천 읍내의 적을 가격하면서 도로를 따라 화천 읍내로 접근하는 3중대에게 계속 조심하라고 외치고 사격으로 신호했으나 거리가 멀어 3중대는 이 경고를 수신하지 못했다.

 

선두 첨병이 지뢰를 밟고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3중대는 계속 화천 읍내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박격포 사격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쉽게 소탕하고 한 시간이 지난 10608;30 화천 읍내를 완전 점령했다적은 모두 북으로 도주해 버렸다. 정오쯤 2중대를 인솔한 김용배 중령이 도착하여 그 높은 성산에 올라와 이용 대위와 1중대원들의 노고와 성공을 치하했다이 대위는 김 용배 대대장이 2중대를 인솔하고 자기가 왔던 험한 길을 그대로 밟아 후속한 것을 알고 감격하였다.

 

대대장이라면 상황 다 끝나고 도로로 편히 올 수도 있었는데 구태어 산길을 따라왔던 것이었다김용배 대대장은 야간에 적의 배후 공격이 없고 무사히 새벽이 되자 바로 2중대를 철수시켜  험한 산길로 1,3중대의 뒤를 후속한 것은 만약 1,3중대에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든다.

 

용배 대대장은 화천을 확보한 뒤에도 적에게 쉴 틈을 주지않게 하기 위해 전 대대에게 도주한 북한군을 쫓아 압박하라는 추격 명령을 내렸다대대는 화천을 벗어나 북진하였다. 도주한 북한군들은 화천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 떨어진 사방거리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했다오후 늦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1대대는 북한군을 치열하게 공격하여 밤 열시 무렵에 이들을 완전 패주시켰다. 1대대 화천, 2대대 화천 발전소는 이제 완전히 점령된 것이다. 동시에 중부전선의 북한군 방어선에 큰 돌파구를 뚫어 북진의 기초를 만들었다이 전투의 대성공으로 화천 읍내에 입성한 7연대 본부는 이곳에서 뜻 밖에 귀중한 군수 물자를 수확했다무려 150여 대나 되는 북한군 트럭을 노획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북한군이 최전방에 이렇게 대량의 트럭을 집결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지만 덕분에 7연대는 이 트럭들을 이용해 다른 사단들보다도 휠씬 빠르게 북진 할 수가 있었다.

 

7연대는 사단 선두에서 계속 북진하면서 북한이 버리고 도주한 트럭들을 모아 기계화해갔다. 나중에 청천강 이남에서 대량의 트럭을 노획하여 이로써 1개 소대당 트럭이 한 대씩 배치될 정도로 풍부한 트럭 300여 대로 7 연대는  최대한 신속하게 압록강까지 기동할 수가 있었다어느 부대보다도 빨랐던 7연대 1대대의 압록강 진격 행운은 이 화천 점령의 전과로 결실을 맺은 38선 돌파 작전 성공에서부터 주어졌다고 하겠다.

 

화천 전투는 그 작전 고비마다 주어진 기회를 기막히게 활용하는 김용배 대대장의 대담하고 기민한 지휘에 의해 단 이틀만에 1개 대대의 작은 병력으로 그 서너 배가 되는 북한 여단 병력이 방어하던 한반도 중부의 북한군 요지인 화천을 점령하였다화천 방어 북한군 병력은 4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여단이었다. 그런 4개 대대의 병력이 그 절반의 절반인 국군 1개 대대에게 12일의 전투 끝에 중부 전선의 요지 화천을 내주고 북으로 도망을 쳤다.

 

허망한 패주였지만 그 며칠 전 1950928일 서울 탈환전에서 있었던 전투를 생각해보자당시 서울을 공격한 부대는 세계 최강 보병 사단인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1개 연대, 국군 육군 1개 연대와 해병대 1개 연대로써 2개 사단을 넘는 대부대였다그런 대병력에 맞서서 서울을 방어했던 북한군 병력이 바로 화천의 북한군과 같은 규모인 1 개 여단의 병력이었다.

 

1개 여단이 악착같이 저항하며 서울을 사흘 간이나 내놓지 않았다화천의 입구는 산악투성이로서 서울보다 방어 작전의 지형적 이점(利點)월등하게 우월했었다. 국군의 평범한 지휘관이 화천 공격의 1개 대대를 지휘했었다면 그렇게 간단히 점령하지 못하고 며칠을 지체했을 가능성도 크다결론적으로 총평을 하자면 김용배 대대장이 지휘한 화천 지촌리 전투는 마치 순간순간의 틈을 노려 상대에게 단칼의 연속 통격을 가해 제대로 힘도 못쓰고 붕괴시킨 결투에 비유할 수가 있다. 노련한 검객의 칼 솜씨를 연상시킨다.

 

오로지 기습은 아군의 실제 전력의 열배를 발휘하게 해준다.”라는 신념의 김용배 대대장이 기민한 직관의 힘이 발휘해 얻은 승리가 바로 화천 전투였다38선 돌파 전투에서 가장 기발한 작전인 이 화천 지촌리 전투는 그 후방을 기습하여 적을 패주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해병대가 감행한 통영 반도 상륙 작전과 전개나 결과가 비슷하다.

 

김성은 대대장이 지휘하는 해병대는 복주머니 같은 통영 반도에 들어온 북한군의 배후에 있는 좁은 원문고개를 해상 침투로 점령하여 적을 섬멸했었다. 이 전투는 잘 알려져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수식어가 탄생할 정도로 크게 유명해졌고 외국에도 소개되었었다그러나 중부 전선의 38선 돌파라는 전략적 과업을 달성한 이 화천 지촌리 전투는 우리 공식 전사에도 불과 몇 줄 소개 된 수준이다.

 

직관이라는 화두가 이미 200여 년 전에 클라우제비츠에 의해서 소개되었었고 요즈음 들어서는 경영학계는 물론 미군이나 이스라엘 군에서도 활발하게 연구가 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이 방면의 연구가 본격화되지 않았는데 조만간 활성화 될 것을 기대하며 그 때 김용배 대대장이나 그 분이 싸웠던 여러 전투가 연구 과제의 대상이 될 것을 기대한다다음에는 김용배 장군이 거둔 직관의 승리에서도 가장 화려한 승리를 거둔 옥산포 전투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36 / Comments 3

  • 2015.04.14 12:01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mnd9090.tistory.com 동고동락 2015.04.15 09:14 신고

      네! 말씀하신 내용 확인하여 반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동고동락에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 2016.05.08 21:08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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