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개천의 ‘현금 열차’ 노획 -3-

 

 

 

 

이 고액의 붉은 돈들은 뜻 밖에도 수많은 3대대 장병들의 목숨을 구해내는 구세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1950 10 26일 압록강까지 진격했었던 7연대[3대대가 소속된 연대]는 은밀하게 침투한 중공군에게 후방을 차단당했다. 급히 철수하던 7연대는 10 30일 자정에 초산 남방 풍장이라는 곳에서 기습을 받고 맹렬히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분쇄되고 말았다.

 

6.25 전쟁 발발 이후 국군 어느 부대보다도 잘 싸웠던 7연대는 이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주력이 옥쇄해버리고 단지 25%생환하는 비극을 만나게 되었다7연대의 생존 장병들은 산산이 흩어져 중공군들이 득시글거리는 산악 지대를 뚫고 탈출해 나와야 했다 

 

              

             

 

7연대 3대대원의 탈출로를 보여주는 1대대 1 중대 이대용 장군의 탈출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한 본대와의 거리는 멀고 중공군과 북한 내무서원들이 우글거리는 적의 바다 속을 뚫고 탈출해 나오던 3대대 장병들은 이 돈을 비할 바없이 값있게 썼다식량을 구하려면 산촌 여기 저기 골짜기에 있던 화전민촌에 접근해야 하는데 이들 현지 주민들이 전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북한 내무서원들은 주민들에게 미리 해놓은 엄벌의 위협도 있어서 이들의 밀고에 의해서 희생된 국군 낙오병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붉은 돈을 가진 7연대 장병들은 화전민들에게 다발 째 돈을 지불해주고 밀고의 가능성을 봉쇄해 버렸다.

 

촌민들은 밀고하게 되면 이 큰 돈을 공산당에게 압수당하게 될까봐 쉬쉬하고 덮어두기 일쑤였기 때문이다촌민들은 평생 보기 힘든 돈을 받고 융숭한 식사 대접은 물론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자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먼 길까지 따라오며 길안내 서비스를 베풀어 주는 친절한 촌민들도 있었다.

 

이는 나중에 국군 포로들이 북한 내부에서 강제로 끌려가다가 동네를 통과할 때면 몽둥이 질은 물론 돌팔매질까지도 서슴지 않고 해대며 매도하던 북한 주민들의 냉혹한 태도와 극히 대비가 된다역시 붉은 돈을 확보하고 있었던 1대대원들도 이 돈의 혜택을 단단히 보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했었던 1대대 소대장 서근석 중령은 부하 10여 명과 묘향산 인근 산 속에서 한 달을 숨어 보냈는데 부하들이 너무 굶주리자 화전민의 소 한 마리를 시가 5,000원보다 훨씬 더 비싼 7,000원을 주고 사서 영양을 보충한 추억을 지금도 가지도 있다많은 부하들이 붉은 돈을 활용해서 탈출해 나왔지만 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돌아오지 못했다.

 

탈출 길에서 조한섭 소령을 만났던 1대대 1중대장 이대용 장군은 조 소령이 자기만 앞서서 탈출하고 부하들을 뒤에 두고 온 것을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발길을 재촉하자는 이대용 대위의 권유를 거부하고 조한섭 소령은 그 장소에서 계속 머물러 뒤에서 후속해 탈출해오는 부하들을 기다렸는데 그 뒤 소식이 없다조 소령은 7연대 군수 주임을 하다가 전임 이남호 소령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자 부대 지휘를 맡았다. 자그마한 키에 조용한 성격으로 부하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김용배 대대장 - 1951년 7월 2일 전사

 

 

국군 최강 연대를 자부하는 7연대에서 쌓은 전공에 자부심을 가진 대대는 김용배 중령이 지휘하던 1대대다. 춘천 옥산포 전투 승리며, 충북 무극리 전투며 경북 신녕 전투에서의 승리는 물론 북진 후 김일성 승용차 노획, 그리고 압록강에 진격한 그 전공은 최강 7연대의 명성을 성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종수 소령이 지휘하던 2대대 역시 동락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북진 때 화천 발전소를 점령하는 등의 전공에 긍지를 가질 만하다. 개전 초기 3대대 장병들 중에 반공 정신이 투철한 서북출신 반공 청년들이 많았었고 정예 부대의 잠재력이 충분했었는데 지휘관 복이 없었다. 개전 초기 3대대는 7연대의 좌측, 가평 전선 쪽에 배치되었다.

 

6.25, 며칠 전 서울에 교육을 갔었던 대대장 인성관 소령은 부대로 돌아왔다가 전황을 살펴보겠다는 엉뚱한 핑계를 대고 서울로 가버렸고 중대장 하 모 대위는 야간에 부하들을 버리고 마누라를 데리고 부산으로 도주했다. 그럼에도 대대원들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잘 싸워서 초기의 위기를 넘겼다그 뒤에 연대 작전 참모 이남호 소령이 지휘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을 당했고 이어서 조한섭 소령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전투력은 결국 지휘력이 좌우하는데 3대대는 지휘관 복이 없어 주로 예비대 역할을 많이 했었고 낙동강 전선에서 잘 싸우며 고생했지만 별다르게 유명한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이번에 7연대 관계자들에게 들어보니 3대대의 별칭이 개천 돌진 부대였다개천에서 3대대가 거둔 현금 열차 노획의 전과는 거대한 경제적 가치의 공급 차단으로 당시 쪼들리던 김일성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긴 것인데 이는 최강 7연대의 다른 대대가 이룬 최고 전공과도 어깨를 같이 할 수 있기에 개천 돌진 부대라는 명칭은 3대대 장병들이 자랑스럽게 쓸만하다고 생각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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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년 청성부대 병사 2021.07.24 16:04

    청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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