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이 구출해낸 전장의 '여성'들 -3-

국군이 구출해낸 전장의 '여성'들  -3-

 


이들을 대대에서 잘 보호하려 했을 때 연대 본부 정보과에서는 조사할 일이 있으니 빨리 연대 본부로 보내라고 재촉해왔다. 김용배 대대장은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몹쓸 가능성을 생각해서 여러 번 거절했지만 연대 본부 정보 주임이 직접 찾아와서 조사를 간청하자 김용배 대대장은 할 수 없이 이들로부터 단단히 다짐을 받고 간호사들을 연대 본부로 보내주었다.

 

연대 본부 는이들을 조사한 뒤에  다행히 후방으로 가는 차편에 서울로 보내 주어 부모님을 만나게 하였다.

[맨 왼쪽이 정 정훈 학생- 고생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막내딸로서 엄청난 역경에서 살아 남았다.]



마침 제일 나이가 어린 박태숙과 정정훈은 1중대 연락병 홍인곤 하사의 부탁으로 멀리 떨어진 1중대 취사장에서 식사 준비를 돕다가 이 귀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줄기차게 북진하는 1대대를 따라 압록강으로 진격하여 뱃놀이까지 했다.

 

그러나 정정훈 여사는 언니 간호사들과 분리되어 박태숙씨와 둘만 남겨지자 겁이 나서 박태숙 씨와 꼭 손을 잡고 다녔다고 하는데 아무 일도 없어서 마음을 놓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1중대는 중공군에게 후방이 차단되었다는 정보에 급히 철수하다가 앞에서 소개한대로 중공군의 기습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1중대는 부하들의 태반을 잃으면서도 두 여고생은 잘 보호해서 포위망을 똟고 이들을 구해냈고 이대용 중대장은 죽음의 포위망에서 탈출해 나오자 바로 다음 날 트럭을 마련해서 두 사람들을 서울로 보내 주었다.

 

정정훈 씨는 죽었다고 생각한 딸이 돌아오자 너무 놀란 어머니와 오빠의 강력한 만류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 복귀하지 못하고 학교도 중퇴해야 햇다.

 

적십자 병원으로 돌아간 박태숙 씨는 이대용 대위와 1중대원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비번일 때는 대대 부식차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동대문 시장에서 기다리다가 연락을 보내 넣어 이대위와 연결이 되었다. 이후 박 태숙씨는 적십자 병원에 30년이나 근무하면서 이대용 대위 가족과 연락하며 지냈는데 작년 5월 17일 작고하였다.


 

[10년전 전쟁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박태숙씨] 


    

당시 학교로 복귀하지 못한 정정훈 씨는 80년대에 방송을 보고 이대위와 연락이 닿았고 그 분의 막내 아들 결혼식에서 이대용 장군이 주례를 서기도 했었다.

 

나는 간호사들의 순결이 위험한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이대용 장군에게 물어보았다. 자기 자랑이 되는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는 이대용 장군은 절제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 부대가 그들을 구조하지 않고 저질스러운 인간이 지휘하는 부대가 이들을 발견했으면 아마 이들 간호사들은 큰 피해를 받았을 거요.“

 

이대용 대위가 북진할 때는 장병들은 사람을 죽이는 전투를 수 없이 치뤘고 북한군이 포로가 된 전우들을 학살한 것도 많이 목격했다. 또 북진하면서도 북한군들을 많이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을 지날 때마다 주민들이 잡아 두었다가 처형을 요청하는 공산당 간부들도 즉석 처형을 많이 했었다.


 

[대대장 시절의 이대용 장군]


문자 그대로 당시 북진 부대는 전투 경험 풍부한 정예 부대이기도 했지만 살인 따위는 별로 양심에 가책없이 하는 킬러 부대였다. 그리고 여자를 경험하지 못한 지 오래라서 폭발 일보 직전의 정욕을 지닌 젋은이들의 집단이기도 하였다. 강간 쯤은 재미로 할 만한 야수의 심리를 가질만한 심리에 있었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 일본군이 중국에서 했듯 모두 윤간하고 후환을 두려워하여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최강 7연대의 장병들인데 이런 극단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대신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질 나쁜 지휘관에게 걸렸다면 간호사들을 코에 골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납북자가 아니라 스스로 북한군을 따라 월북한 부역자로 몰아 버리기가 쉽다는 약점을 악용했을 것이라는 지적했다. 못된 간부들이라면 이들 여성들을 부역자 집단이라서 총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엄청 겁을 주고 그 중 얼굴 반반한 여성들과 억지 동침을 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 앞서 뿅코 몇 마리 운운한 김 모 중대장은 이런 간부들만의  윤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겁을 먹고 몸을 내준 경우 강간범은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라고 버티면 후일의 말썽을 피해 나갈 수가 있다. 여성이야 죽지 못해 당했지만 그 당시 사회 개념이 정조를 잃은 사실이 알려지면 결혼도 못할 지경이라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켰을 것이리라.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1

  • 팔성 2016.04.26 12:52

    당시 북한에 진주한 국군을 따라서 국군내 혹은 별도의 서북청년단이 들어간 것이 화근이죠. 보복처형과 임의처벌이 횡행했고, 1.4후퇴때에는 같이 남한으로 가지 않으면 북한동조자로 봐서 죽인다는 식으로 협박하여 물경 수십만이 강제로 월남을 하죠. 뭐 맥아더가 북한지역에 핵폭탄을 떨군다는 소문도 파다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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