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연대 창설 1기 - 서근석 중령의 회고 -7-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중대는 기어이 포위망을 뚫고 청천강을 건너 묘향산으로 탈출해 버렸다. 청천강 도강 때도 적의 원거리 총격을 당해 20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이제 중대 병력은 4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더 남쪽으로 이동해서 국군을 찾던 1중대는 동창리 부근에서 중공군을 피하는 행동 중 하나로 두 개로 나뉘어져 따로 탈출하였다.

 

서근석 씨는 이대용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 주력에서 분리된 10여 명의 부하들을 지휘하고 남하, 도주를 계속하였다그러나 중공군이 길마다 넘치고 흘러 더 이상의 남진은 불가능하다고 본 부대는 일단 묘향산 깊은 곳으로 은신해 기회를 엿보았다. 서근석 씨는 이 도주 중에 한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부하들은 너무 지쳐있었고 굶주려 있었다. 부하들에게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와 부하 몇 명은 마을로 스며 들어가 수색을 하다가 황소를 기르고 있는 집을 발견하였다마침 장병들에게 분배된 노획 북한 화폐가 많았던터라 거절하는 주인에게 북한 시가 5,000원 하는 소를 7,000원 값을 주고 사와 포식을 하고 모두 기운을 차렸다.

 

북한군에게 납북되어가던 중에 1중대가 구출해낸 간호 여고생 두 명까지 데리고 탈출을 했던 이대용 대위는 탈출 아흐레 만에 7연대 장병 중에서 가장 빠르게 사단으로 복귀했지만 아직도 많은 7연대 낙오병들이 평안북도 산간을 헤매고 있었다중공군 주력이 있던 지역의 서근석 씨의 부대는 은신을 유지하고 있다가 거의 한 달 만인 11월 말에야 복귀할 수가 있었다.

 

 

 

이대용 장군 중대가 구출해서 압록강까지 데리고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는 역경을 함께한 당시 적십자 간호 여고생 정정훈 여사와 두 자녀

 

 

병력의 태반을 잃은 7연대는 후방에서 보충해온 미숙한 병력으로 다시 전투 부대를 꾸려 평양 가창 북쪽 미륵 고개를 막다가 중공군의 막강한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후퇴하여야 했다. 서근석 씨는 늦게 복귀했기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초산에서 같이 탈출했었던 중대원들과 함께 - 중대장 시절

 

 

 

서근석 씨가 귀대 후 7연대는 평양을 거쳐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2주 넘게 도보 철수 후인 12월 중순, 부대는 한탄강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대기했다무척 추운 이 시기 그런대로 고정된 전선에서 7연대는 초산에서 당한 뒤에 새로 배치된 신병들을 훈련하여 한편 휴식을 취했다. 이 혼전의 시기 직전인 1223일 중대장 이대용 대위가 고열을 내고 앓은 바람에 후송되었고 서근석 씨가 며칠간 1중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해 연말 19501231일 중공군은 대공세를 취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3차 전역이다7연대는 투혼을 발휘해 맹렬히 응전했다.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다. 아침이 되고 나서야 옆의 연대인 6사단 19연대가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7연대는 더 이상 이곳을 방어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밤새 중공군은 그들의 상투 전법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7연대가 지키는 한탄강과 동두천 사이를 차단했다.

 

초산에서와 같은 상황이 된 이 순간에도 우회 탈출 방법은 없었다. 7연대는 포위망이 더 단단해지기 전에 정면 돌파를 해서 탈출하기로 하였다. 항공 지원을 받기위해 주간에 감행하는 것이 전번 초산 탈출과 다른 차이였다부대는 의정부 방면으로 동두천 가도를 따라 정면 돌파를 했다. 차량의 운전병들이 부족해 김용배 대대장이 대대장 차를 직접 운전하다가 그만 차가 고랑에 처박혀 머리에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중공군은 좌우 언덕에서 사격을 가해왔다. 또 돌파가 막혀 중공군의 야간 공격을 받아야 하나 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었지만 미군의 포격으로 중공군은 침묵시킨 7연대는 의정부 방향으로 계속 돌파하다가 덕정에 이르러 완전히 적 포위망을 뚫었다광나루 앞에서 꽁꽁 얼은 한강을 건넜는데 미군들이 중공군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한강을 따라 포격을 가해 물골을 만들던 장면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서근석의 부대는 1월초 경기도 용인군의 백암면에 도착하여 압록강으로 부터 시작한 길고 긴 철수의 종지부를 찍었다. 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7연대 부연대장으로 영전했고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대위는 귀대하자 1대대 부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서근석 소위는 진급을 하여 중위로 1중대를 다시 지휘하였다.

 

 

 

 

재북진 때 춘천 부근에서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호주군 군모를 쓰고 말 위에 앉아서 멋을 부리는 서근석씨.

 

 

 

7연대는 중공군의 후퇴로 한 발씩 전진하면서 4월을 맞이했다. 봄이 오자 중공군은 남한의 절반을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5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5차 전역, 유엔군측에서 말하자면 춘계 공세의 대공세를 취했다공세 초기에 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대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를 당하였다.

 

사창리 전투 하루 전 서근석 씨는 몸살을 앓아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후송을 가버리는 바람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6사단은 후에 용문산 전투의 대승으로 사창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였다이 중공군의 대공세 뒤에 서근석씨는 7연대 보급관의 보직을 받아 몇 달간 근무하다가 1951년 후반에 4개월 코스의 초등 군사반 교육 명령을 받았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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