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연대 창설 1기 - 서근석 중령의 회고 -4-

  

 

 

 

 

 

 

이어서 충청북도의 국방 경비대 조직은 확장을 계속해 1년 뒤에는 충청북도에 1개 연대가 창설되었다. 1대대는 충북 청주에, 2대대는 충북 영동에, 3대대는 충북 충주에 주둔했다7연대가 발족할 무렵 생활관이 비좁아서 크게 고생했었던 장병들은 청주 정암산 아래 구 일본군 병영으로 이주하였다.

 

이 곳은 다수의 인원들이 지낼만한 여러 시설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생활하기에 별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편성이 완결되자 47115일 드디어 연대 창설식을 거행하고 초대 연대장에 민기식 소령이 취임하였다. 6.25 전쟁 때 막강한 전공을 세운 최정예 7연대가 탄생한 것이다. 연대 본부는 1대대가 있던 구 일본군 병영에 자리잡았다.

 

7연대는 좌익들이 들끓어 부대 운영에 애를 먹은 다른 부대에 비하면 그런대로 순탄하게 성장의 기틀을 다져갔다그러나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며 1기생인 남영희가 처우 개선과 봉급 인상을 요구하며 475, 5~60명의 병력을 부추겨 공공연한 집단 탈영을 주도했다. 그들 주모자들은 물론 좌익사상을 가진 자들로서 당당히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영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공개적인 집단 탈영이었다.

 

이에 격분한 민기식 소령이 고문관 미군 하브스 소위의 M-1총을 빌려 들고 뛰어 나가 선두의 전방에 사격을 가하고 일갈하자 이들은 기가 죽어 되돌아 왔다. 이들을 생활관에 가둔 민 소령은 항명자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가하는

체벌을 준 뒤에 관용을 베풀어 잘 설득하였고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다서근석 씨는 당시 연대 내에 좌익 사병과 부사관들이 여러 명이 있었고 노골적으로 들어 내놓고 하지는 못했지만 은밀한 이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조영희를 비롯해 여러 좌익 사병들은 숙군 과정을 거치면서 전부 도태되고 말았다.

 

최초 중대 규모로 출발했던 국방 경비대는 그 규모를 정규군 체제로 키워갔다7연대는 47121일 채병덕이 사령관이었던 1여단 소속이 되었다가 486144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가 4여단이 4811206여단으로 개칭된 뒤에 이어 6여단 소속이 되었다. 청주 주둔시 4여단의 본부는 연대 본부 병영의 지척이고 일본인 여학교였던 현 청주 여고 건물에 개설되었다.

 

49220, 여단이 원주로 이동함에 따라 7연대도 청주에서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였고 동년 56일 다시 춘천으로 이동하였다. 6여단은 연대가 춘천으로 이동한 뒤인 49512, 6사단으로 승격되고 유재홍 대령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체제로서 7연대는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19496사단 국방부장관 사열대기

 

 

6사단은 원래 7연대, 8연대, 10연대로 구성되어 창설되었다. 그러나 8연대가 48년 강태무, 표무원 두 좌익 대대장이 대대를 이끌고 월북해버리자 수도 방어사로 배속 변경되어 급거 춘천 방면으로 파견되었고 10연대는 나중에 8사단의 창설 연대로 6사단에서 빠져 나갔다그 후에 19505119연대가, 19506202연대가 6사단의 편제에 들어왔다그러니까 7연대는 탄생할 때부터 가문을 지킨 6사단 혈통의 적자(嫡子)격인 부대라고 하겠다.

  

보급 체계도 조금씩 나아져 일본 군복과 군화를 벗고 국내 조달한 군복으로 바꾸어 입은 것은 국방 경비대가 창설된 해인 46년 말이 되어서였다. 국군은 창설 초기 일 년 동안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활동했다는 이야기다서근석 씨는 그때 지급받았던 국산 군복의 질이 생각보다는 괜찮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 화기의 교체는 상당히 지체가 되었다. 부대가 일본군의 99식 소총에서 M1 총으로 장비 전환을 하기 시작한 것은 47년도부터였으며 단시간에 전부 교체를 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M1 소총

 

 

 

서근석 씨는 커가는 부대 조직과 함께 자기도 진급을 하며 맡은 직책도 바뀌게 된다. 간부들에게 성실함을 주목 받은 서근석 씨는 일등병 때부터 연대 보급계를 맡아 2,4, 즉 피복 등의 보급을 담당하였다입대 2년도인 48년도에는 계급도 오르고 여단 기구도 확장되어 그는 여단 사령부 본부 중대 인사계로 전출하였다선배는 없었고 업무는 늘어나니 자연히 그의 진급은 대단히 빨랐다. 해에 그는 특무 상사로 진급했다.

 

여단이 원주로 이동하기 직전이었다. 서근석 씨는 이곳에서 여단 선발 신병 업무를 담당하였다장병들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사병들 봉급은 단 250원으로서 이 월급으로 병 막걸리 한 병을 사면 끝이었다영외 거주는 이등상사 이상이 되면 할 수가 있었고 하숙비조로 부대에서 쌀이 지급되었다. 서근석 씨는 이등 상사가 된 청주 시절에는 본가에서 출퇴근 했으나 7연대가 원주와 춘천으로 이동했을 때는 하숙을 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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