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연대 창설 1기 - 서근석 중령의 회고 -3-

 

 

 

 

 

 

 

훈련소 건물로 쓸 만한 큰 것은 단 두 동의 일본식 건물 밖에 없었고, 작은 부속 건물이 댓 채 있었을 뿐이었다. 내부에는 훈련소 숙박 시설로써 기능을 할 만한 시설이 아무 것도 없었다. 서근석 씨는 과거 글라이더 공장에서 배운 목공 기술을 발휘하여 훈련 내내 총가(銃架)나 책상, 의자 등의 각종 가구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생했다.

 

1기생이 훈련을 시작하면서 곧 바로 2기생의 등록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1기생이 훈련을 받는 중에 합류하여 훈련을 같이 받았다기존 두 동의 건물로는 팽창하는 병력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24인용 천막들이 준비되고 이곳이 생활관이 되었다.

 

1, 2기생들이 훈련을 마친 한참 뒤인 여름에는 3기생 입소가 있었다. 명색이 군인이 되었으나 병참을 책임진 미군은 예산 관계였던지 기본 피복과 무기조차 현지 조달하는 인색한 정책을 써서 창설 요원들은 생고생을 해야 했다군복은 일본군들이 놓고 간 것들이 지급되었다. 군화도 일본군의 군화인 목 짧은 헨조카[編上靴]를 신고 각반을 둘러야 했다.

 

다른 개인의 기록에 의하면 창설 초기 낡은 군복들이 지급되어 엉덩이가 보이는 넝마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서근석 씨 부대에는 그런 폐품 수준의 일본 군복은 별로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지급 된 총기는 미군의 기본 화기인 M1소총이 아니라 일본군이 두고 간 99식 소총이었다.

 

 

 

 

 

  99식 소총

 

 

주식으로는 쌀이 아니라 통보리나 밀이 배급되었다. 이것들은 거칠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장병들은 애를 먹었다. 화장실에 가보면 벌건 혈변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대신 미군들에게 지급되는 소세지나 햄의 깡통들이 다량 지급되어서 부식만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기름진 미국 음식을 섭취한 농촌 출신 장병들의 위장이 잘 적응을 하지 못해 심한 설사를 하기도 했다.

 

훈련은 미군 부사관들이 담당하였다. 제식 훈련에서 각개전투 등, 지금도 신병훈련소에서 실시하는 기본 교육들이었다. 서근석 씨는 고된 훈련보다도 내무생활이 더 고생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빈약한 지급품의 문제도 있었지만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내무반[현재의 생활관]분위기였었다. 내무반 군기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휘둘러대는 일본 군대식 폭력이 이미 이 창설 부대의 훈련 단계에서부터 파고 들어왔다.

 

서근석 씨의 말은 나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창설 부대이고 괴롭힐 고참들도 없었을 텐데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서근석 씨는 훈련 단계의 분위기를 옛날 감방의 분위기에 비유했다. 수감 기간이 길고 힘센 놈이 제왕처럼 군림하던 곳이 옛날의 감방이었다. 봉급이라야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던 경비대에 입대한 사람들중에 나이가 많은 지원자들이 많았었고 일본군 출신의 군경력자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기본 욕구인 굶주림 해결조차하지 못하는 사회의 밑바닥을 헤매다가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에 입대한 사람들 중에 무뢰한들도 있었다. 이들 일본군 출신과 무뢰한 성격의 인간들이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내무반 운영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수단은 일본군식의 폭력이었다. 서근석 씨처럼 어리고 순한 사람은 행패를 부리는 고참들에게는 만만한 상태였었다.어린 그는 무척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하던 훈련이 끝나고 6주 후에 서근석 씨는 이등병 계급장을 부여받고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근석 씨는 특히 일본군 출신에 대한 안 좋았던 감정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들 일본군 출신들은 내무반에서도 일본식 상습 폭력을 휘두르더니 실무 부대에 가서는 군 경험 없는 사병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급하여 일반 병들 위에 군림하였다. 수준 높지 않은 일부 일본군 출신들의 내무반 병영 장악은 창설기 국군의 배양토에 일본군의 저질 병영 문화를 이식시켰다. 구타와 인신 모욕,절대 복종 강요, 그리고 고참병들이 누리는 특권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일본군 출신들이 한국전쟁동안 국군 전투력을 발휘하는 주요 인적 구성 요소이기도 했다는 긍정적인  부분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서근석 씨는 어려운 신병 시절을 지나며 열심히 근무를 해 윗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국방 경비대 시절의 서근석 씨

 

 

 

한편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가던 국방 경비대의 계획대로 충북 지방의 부대도 확대해 나갔다그가 속했던 1기생들로 A중대가 편성되었고 조금 늦은 4642, 2기생들로 B중대가 창설되었다. 여름에 입소했던 3기생들은 졸업 후 C중대가 창설 인원이 되었다. 이로써 청주를 기반으로 하는 1대대가 편성 완료를 알리게 된다.

 

 


 

초산전사에 의하면 이 A,B,C중대를 기반으로 2대대가 창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근석 씨의 기억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다한국전 발발시 고향이 청주인 몇몇 1기생들이 7연대 1대대였다는 사실을 보면 서근석 씨의 증언이 맞다고 판단된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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