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연대 창설 1기 - 서근석 중령의 회고 -2-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이 패망하자 조선 경찰력 절반을 구성하던 일본인 경찰들도 귀국해버려서 고향의 치안 유지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젊은 민기식 씨는 고향의 치안이 불안하자 지방 유지들을 설득하여 '장정대' 를 조직한 것이었다.

  

 

 

 

민기식 대장

 

  

민기식 씨가 해방 조국의 미래에 국군이 필요하다고 보고 미리 예비 조직을 만들지 않았나하는 하는 생각이 드는데 결과는 민기식 씨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준다지역 자원 봉사자 단체 수준의 청주 장정대는 우리 국방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두 분의 4성 장군을 배출한 것이다.

 

민기식 대장과 김종오 대장이다. 민기식 대장은 만주국 건국대학교 출신, 김종오 대장이 일본 중앙대학교 출신이었다. 둘 다 충북 청원군이 고향으로써 민 대장이 청원군 북일면 출신이고, 김 대장이 청원군 부강면 출신이었다. 모두 일본군에 학병으로 끌려가서 장교로 임관했다가 종전을 맞아 고향에 돌아 왔던 것이다.

 

  

 

 

 

김종오 대장

 

 

 

두 사람이 종전 후에 알게 되었는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그러나 장정대 조직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민기식 대장이 책임자가 되고 김종오 대장이 훈육 담당이라는 명칭의 부책임자가 되어 조직을 추진했다장정대의 조직을 위해서 청주와 청원군의 유지들이 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현재의 청주대학교 설립자 김원근 선생이 후원 회장이었다.

 

이들의 모금이 장정대의 운영 자금이 되었다. 장정대 대원은 100여 명 정도였다. 입대할 때 별다른 심사는 없었다. 보수는 없었고 침식만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장정대는 현 청주 우체국 앞의 일본인이 두고 떠난 빈 여관을 합숙소로 삼고 활동을 했다.

 

 

 


 

7연대사인 초산전사는 장정대를 장병대로 잘못 오기[誤記]하고 있다. 서근석 씨에게 되풀이 확인해본 바 장정대가 맞는 명칭이었다. 또 초산 전사는 농사 훈련소를 숙소로 사용했다고 했는데 이곳은 다음 해 국방 경비대가 생기고 나서부터 사용되었다.

 


 

장정대의 활동은 순찰을 위주로 한 치안 활동이 주요 임무였었고 화재가 났을 때는 소방 작업에 출동하기도 하였다. 무기 지급은 없었고 학교에서 교련에 사용하던 목총을 구해서 순찰 때 휴대했었다. 복장도 자유, 단지 팔에 붉은 글씨로 장정대라고 쓴 완장만을 둘렀었다.

 

내무 생활도 자유로웠다. 일체의 신체적 징벌도 없었고 가끔 정신교육 수준의 훈시만 있다. 여관에서 일하던 여자 두 사람이 계속 남아서 식사를 전담하였다. 여관은 벽을 치우면 굉장히 큰 방이 되는 구조가 있었다. 장정대들은 이 큰 방에서 그냥 침식을 같이하였다. 서근석 씨의 기억에 의하면 분위기도 좋아서 중간에 탈퇴하는 젊은이들은 소수였다고 한다.

 

장정대의 활동은 겨울이 되고 다음 해인 1월 서울에 군사 영어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민기식 대장과 김종오 대장이 군사 영어 학교에 입교하게 되자 자연히 중단되고 장정대는 해체되었다서근석 씨도 집에 돌아와 쉬게 되었다. 1946114일 미 군정하에서 한국 국방 경비대가 발족되어 각 도에 일개 연대씩 부대를 설립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1월 하순 민기식 대장이 국방 경비대 참위[소위]로 임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종오 대장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 청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돌아오자 장정대원들과 연락을 취하며 창설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 경비대의 창설이었다. 최초 창설 부대는 미래 국군의 한 톨 씨알일 수도 있는 1 개 중대였다.

 

서근석 씨는 경비대가 창설되면 이에 응모하기로 결심했다. 27일 미군 하브스 소위와 부사관 2명이 청주로 내려와 부대 창설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부대 창설 요원들을 뽑는 첫 날 27, 서근석 씨와 장정대의 동료들은 모병소에 찾아가 등록을 하였다. 나중에 7연대 1기생이라고 불리는 이들 창설 요원들은 4년 뒤에 밀려온 6.25 전쟁을 맞아 최전선에서 호국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희생하는 핵심 전사[戰士]들이 되었다.

 

초산 연대의 공식 전사에 의하면 1기생들은 205명이었다. 7연대 군번 1번은 박남복 씨였는데 6.25 전쟁기간 전사하였다. 서근석 씨는 7연대 군번 170011번을 받았다. 7연대의 11번째 지원자라는 표시였다. 1기들의 훈련소 입소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946219일에 있었다훈련소는 청원군의 농사 훈련소였었다. 이 곳은 현재 충북대학교 캠퍼스의 일부다. 이 곳에 7연대 창설지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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