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공비 정순덕 흔적을 찾아서 -3-

 

 

 

 

정순덕은 허벅다리에 칼빈 실탄이 관통했지만 생명은 건졌다. 그녀는 산청으로 호송되어 보건소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이후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1985 8.15 특사로 사회로 나와 다리 하나가 없는 채로 별 어려운 일을 다하며 근근히 살아갔지만 가족과는 왕래가 별로 없었다.

 

 


 

정순덕과 이홍희 목에 걸린 현상금 100만원은 김영국 경사에게 80만원이 주어지고 박기덕 순경에게는 20만원이 포상되었다. 김영국 경사는 그 상금으로 산청군의 논과 진주 시내에 부동산을 사두었는데 그 준비 덕분인지 경찰 퇴직 후에 목욕탕을 하며 어려움 없이 살았다인터뷰를 하려고 알아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몇 년 전 작고했다고 한다. 이 국방부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정순덕 글에 그 분의 외손자가 찾아와서 인사를 남기고 간 일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정순덕이 체포 되었던 바로 대원사 골짜기의 깊숙한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골짜기는 정말 깊었다. 상류로 올라갈 수록 고도가 높아졌다. 주변의 산도 매우 험했다.

 

 

 

 대원사 계곡 상류에서 내려다 본 계곡 길 - 내내 오르막 길이다.

 

 

 

순수한 사족(蛇足)이다. 전술 전략에 관심이 있던 내가 대원사 골짜기 방문 때 생각났던 것을 필요한 군 관계자분들에게 참고가 될까해서 여기에 남겨둔다. 올라가면서 이 험악한 산을 보다가 정순덕 일당이 13년이나 버티었던 것에 한 의문의 단서를 볼 수 있었다세사람의 공비들은 민간으로부터 보급이 없었다면 이 긴 세월을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깊은 계곡을 올라가며 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공비들이 횡행하는 이 깊은 산골에 약초꾼이 자주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그러니 산삼같은 귀한 약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석청이나 송이같은 값 비싼 산물도 많았을 것이다.순덕이 이를 채취해서 통하는 주민들에게 헐값에 넘기고 생활 필수품을 구입했다고 본다.

 

산청에서 돌아 온 뒤 다시 정순덕의 책을 보니 그녀의 바로 이런 생산 활동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나 있었다. 심지어 곰을 잡아서 웅담을 얻는 대목도 나온다. 주민들은 경찰은 멀고 공비들이 횡행하는 산골은 가까우니 보복이 두려워서 내키지 않은 협조를 하는 배경도 있었지만 큰 이윤을 남기는 상품의 소득이 있었기에 협조했었던 자발적인 요소도 있었다. 남한의 공비들이 씨가 말랐던 것은 군경이 이들을 산속으로 몰아 넣은 뒤에 식량 조달의 길을 봉쇄했던 것에도 큰 이유가 있다.

 

세계의 공산주의 게릴라들은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는 거창한 이상을 추구하고, 하다못해 흉내라도 냈지만 한국의 공비들은 이런 거창한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굶주린 좀도둑 집단으로 전락하였다공비들은 만사 제쳐놓고 생사를 걸고 보급 투쟁이라는 식량 확보 일에만 매달리다가 끝장이 난 것이었다그런데도 소수로 남아 경찰 피신이 자유로웠던 정순덕 일당은 기발한 생산 활동으로 생존의 길을 찾아 13년이나 버티었던 것이다. 이홍희나 정순덕이 산간 출신이라 이런 방면에 경험이 많아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반 게릴라 전술에서 산지나 야지에 고립된 정순덕같은 소수의 게릴라들의 생산 활동을 통한 장기 생존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비슷한 일화로 탈레반들의 마약 대량 재배에 의한 소득사업이 있다.) 정순덕의 체포 활동에서 이 생존의 요소인 약초 채취나 판매라는 것도 분석 조사되었다는 글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만약에 이 요소가 주목되었더라면 정순덕의 체포가 의외로 빨랐을 수도 있었다철에 따라 약초가 많이 나는 장소나 유통 경로, 그리고 공비 활동에도 불구하고 약초를 캐는 주민들을 수사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이 분석에서 의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순덕의 체포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통나무 집

 

 

골짜기 여기저기서 만난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계곡의 맨 꼭대기 부분까지 왔지만 정순덕의 체포 장소를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골짜기의 상류는 끝나고 산을 넘어 대원사 골짜기까지 넘어가는 것이 된다그 곳에도 식당이 있었다. 주중이라 손님이 없는 식당이 그 계곡이 끝나는 산머리에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정순덕의 체포 장소가 어딘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옛날 죽음이 군민들에게 매일 명멸했었던 산청의 어디서도 들을 만한 대답을 들었다.

 

뭐요? 그런 것, 나는 몰라요!”

 

얼음 같은 그의 대답에 나는 멈칫했지만 이미 들은 말이 있었다. 정순덕의 생가를 찾아갔던 어느 분이 거기서 겪은 말이다. 그녀의 생가는 이미 다 없어진 상태다. 그분이 근처 농가의 아낙에게 정순덕 집터를 물어보니 그 아낙은  화를 벌컥 내며 나는 그런 것 모른다고 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더라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던 지리산 인근 주민들이 보신을 위해서 갖게 된 의심의 본능이 60년의 세월이 흘러도 시골 여기저기 핏물 흘렀던 곳의 후손들에게까지 유전되었던 것이다나는 그런 말을 들었기에 더 묻지도 않고 돌아나와 다시 계곡을 되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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