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 해방군의 ‘민박’ 훈련



 



중국 인민 해방군의‘민박’훈련




중국이 1999년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했었던 엄청난 규모의 중국 인민 해방군 분열식이다. 군악대만 1,000명 수준이다.

연주되는 곡은 일제시 중국으로 건너갔었던
전남 광주 출신 정율성씨다. 광주시는 그를 기념하여 정율성 음악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중국 인민 해방군의 공식 군가로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연주된다.

분열식에서 터져 나오는 명령어는
샤오 고![ 향우!] 국군에서 행해지는 우로 봐!이다. 





며칠 전 한 부대 지휘관이 사병들의 내무생활에 출퇴근 개념을 도입하는 실험을 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고 이어서 이를 크게 긍정 평가하는 신문 사설까지도 등장했었다.

신문 기사 중에 '내무생할하러 군에 가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제일 인상이 깊었는데, 혹독한 군기의 내무생활 시대를 거쳤던 나로서도
군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의견이었기에 공감이 갔다.

이런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던
그 지휘관의 과단성과 창조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가 앞선 글에서 짧게 언급한 것 처럼 
이번 해병대의 총기 사고가 해병대만의 병영문화 쇄신의 계기 뿐만 아니라 미래전에 대비한 국군 전체의 조직 관리 시스템을 돌아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여기서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사례는 이웃 나라
군대인 중국 인민 해방군의 한 민박형 야외 훈련이다.[이하 중국군으로 약칭한다.]


              대민 봉사는 중국군의 주요 군 기능 중의 하나로서 오랜 전통이 있다.


내가 이 기발한(!!) 훈련 방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중국 동포들이 한국을 대거 방문하기 시작한 때였는데 중국군에서 복무했던 한 동포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70년대 말에 중국군에서 전사[戰士-사병]로서
군 생활을 했는데 병과는 포병이었고 주둔지는 자무스였다. 그의 부대는 로케트 부대였었다.[이하 전사(戰士)는 병사로서 표시한다.]

호된 군기 속에서 군 생활을 했던 나는 그의
말에서 신기한 것을 적지 아니하게 느꼈었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의 중국군 내무반 구성원이 겨우 5~7 명
수준이었으며 사단에 농장과 자체 목장이 있어서 육류와 채소가 풍부하게 지급되었고 고기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식탁에 올랐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내무반원끼리 모여서 만두를 빚어 먹은 추억담도 들려주었다.

국인 대다수가 중국이 못 산다고 생각했던 그 무렵 중국 군대의 생활수준이 아주 괜찮았다는 것이 내심 충격적이었는데..그런 나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야외 훈련을 나가게 되면 전 병력이 각 농가에 나뉘어 숙박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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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 군(軍)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정석(定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군은 모택동이 거병(擧兵)하여 정강산[井岡山]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조직화 되었던 홍군[紅軍]시절부터 중국 공산당 정치의 중요한 도구였다.

모택동은 정치적으로 인적 자원 등의 확보를 위해 인민의
지원이 절실했었기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시골 정치인처럼 인심을 얻기 위한 갖가지 활동에 힘을 쏟았다.

산간벽지의 농민 사회까지 파고드는 홍군은 이런 정치 활동의
중심 세력이었고 장개석 군대에 대한 전투와 함께 공산주의 전파는 물론 인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모든 정치 선전을 다했었다.

홍군에게는 인민에 대한 서비스 제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한 행동수칙인 3대 기[규]율 8항 주의의 규율은 중국군 역사에서 전설의 규율이다.

그래서 야외 훈련 중 민박 훈련은 이런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은 비록 그런 정치 목적이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인민과의 유대를 깊게 하는 전통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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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호 입구에서 미 해병 7연대와 최초 전투에서 대패했던 중국 124 사단장
임치량
               현대 중국군의 장비나 군복은 그때 수준과 하늘과 땅 차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출퇴근 개념의 내무생활 기사를 보고 20여 년 전에 내가 중국 동포에게서 들었던 민박 훈련이 생각나 며칠 전 다른 중국 동포를 만나서 다시 한 번 그 전모를 들어 보았다.

수소문해서 만난 동포는 1990년대 중반 쯤에 요녕성 해성이라는
곳에 주둔했었던 39군 소속 김현건이라는 사람이었다.

39군은 1950년 10월 중국 동북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택동의 참전 명령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에 침투했고 평북 운산 일대에 잠복해 있다가 한국군 1사단과 미 1 기병 사단을 공격했다.

(국군 1사단은 39군의 포위망에 갇히지 않고 간신히 빠져
나왔지만 미 1 기병사단의 1개 대대가 거의 섬멸당해 버렸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참전 초기에는 은밀히 야간에 도강했었는데
위의 사진은 전쟁이 한참  진행 된 후의 겨울 모습 같이 보인다. 


김 씨는 보병이었다. 그는 자기의 부대가 크게 동원되었던 야외 기동훈련 때 경험했었던 민박훈련에 대해서 들려주었다.[중국군에서 야외 기동훈련은 외훈[外訓]이라고 칭했다.]

1990년 미국이 걸프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자극을
받은 중국은 39군 3만 명을 총동원한 대규모 동계 훈련을 실시했다.[중국군의 군은 군단에 해당한다.]

동계 훈련 기간은 무려 2 개월이나 되었다.
한국보다 훨씬 추운 그 북방에서 한 개 군(軍-우리의 군단에 해당)이 총 출동해서 2개월간이나 동계훈련을 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 군의 개념으로는 상상하기 힘들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국기 게양식이나 하기식은 외국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행사는 인민 무장 경찰 부대에서 주관하고 있다.[무장 경찰은 국방성 소속이다.]

위의 사진은 중국 동포 황기연 소좌로
무장 경찰부대 북경총대 군악단 제 2대대 대장인데 무장 경찰 부대 군악단에는 동포 군관 4명이 있으며 모두 소좌들이다.

참고로 중국 인민 해방군 행진곡은 연안시절
전남 광주 출신 정율성씨가 작곡한 것이다.


김 씨의 부대는 훈련장이 있는 길림성 백성자로 이동했는데
39군 전체가 수 십 편의 특별 열차를 이용해 전차, 장갑차, 차량 및 각종 장비와 기물들을 전부 적재하고 2박 3일 동안 이동했으며 워낙 큰 대군이 이동하느라 객차가 부족해서 전사들은 모두 화차로 수송했다고 한다.

백성자 훈련장은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활한 곳이었는데 이들이 두 달 간 숙박할 곳은 한국군이나 미군의 훈련에서 볼 수 있는 야전 천막 숙소가 아니었다.

앞서 말한대로 농가에 머무르는 민박(民泊)훈련이었다.
3만 명의 39군 병력은 추운 12월과 1월의 숙박을 위해서 훈련장 몇 개의 향[鄕-한국의 면에 해당]에 분산되어 농가에 숙박하였는데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숙소로 배정된 농가에 도착 하자마자 바로 짐을 풀 수가 있었다.
 
한 집에 한 개 반(班-분대)이 머물렀는데 대개 농가의 큰 방에서 한 개 반, 8명 정도가 잠을 잤다. 그런데 마을의 집들이 비슷비슷하다 보니 병사들 중에 자주 자기 반의 민박집을 잃어
버리고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찾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농가는 대체로 큰 방 두 개로
되어 있어서 한 반이 충분히 장기 숙박 할 수가 있었다. 이불은 군에서 가져 간 것을 사용하였으며 식사는 마을에 미리 설치된 연[聯-중대] 식당에서 해결했다.

민박하는 전사들에 대한 지휘관의 통제도 별다르게
가해지지는 않았으며 소대장이나 다른 간부들도 전사들과 합숙을 했었다.[한국군의 부사관급은 중국군에서는 직업병으로 불렀으며 미군과 같이 사병생활을 거쳐 임관한다. 간부에 해당한다.]

단지 연장[聯長-중대장]이 3-4일 마다 한 번 씩 민박 농가를
방문해서 집주인을 만나 문안 인사를 하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외는 영내와 같이 취침 30분 전, 전 중대원이 동네 중심에 집합해서 인원점검과 지시사항을 하달 받는 수준이었다.

그 추운 겨울에 연료로 쓰는 땔감은 대개 주인이 그냥 서
비스로 제공하기도 했지만 민박하는 병사들이 들에 돌아다니면서 구해오기도 했었다.

민박 주인들에게 중국 정부에서 별도의 숙박료를
지불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민박 하는 인민 해방군 장병들이 집 주인인 농민들을 위해서 최대의 성의로써 봉사를 해야했는데 잠자는 것만 빼놓고는 티끌만한 피해도 주어서는 안 되며 가능한 많은 봉사를 하라는 철저한 지시가 있었다.

겨울이지만 농가에서 할 일은 많았다.
집이나 울타리 등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민박 반원들이 달려 붙어서 다 수리해주었고 농민들이 기르던 가축의 여물 만들기나 축사의 거름치우기도 했다. 육체적인 봉사 외에도 학력 높은 병사들은 농민 자녀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중국 남부 사탕 수수밭에서 하는 대민 봉사로 보인다.


전사들의 일과는 영내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5시 30분이면 정확히 훈련 일과가 끝났다. 일과 시간 중에 봉사를 위한 특별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어도 농가에 민박하는 인원이 많다보니 일과 후에 저녁 먹을 때까지 봉사를 해도 시간이 충분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이고 모두 가난했었다.
부대에서 공급하는 부식이나 감미품[과자류] 등을 아껴서 주민들에게 주면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행여 이렇게 민박을 하면서 통제가 안 되니
전사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질이나 난동을 부리고 농가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원칙적으로 민박 훈련 때는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민박 생활동안 술을 가끔씩 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폭음하는 병사는 찾아 보기 힘들었고 남의 집에서 민박하는 처지에 눈치가 보여 고주망태가 되게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해방군을 민박으로 받아들이는 농가들 중에 훈련이
있을 때마다 자청해서 병사들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사이가 좋다보니 농민들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위해 뜨거운 물을 준비 해 두기도 했고 간식으로 삶은 계란을 가져다주기도 했었다.

이렇게 몇 주를 지나다 보면 병사들과 농민들 사이에 인간의
정이 통하는 친밀한 관계가 깊숙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즉 민박 훈련을 통해서 민[民]과 군(軍)의 관계가 더 이상 바랄 수 없이 좋아지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중국 인민 해방군이 희망하는 목표이기도 했었고 또 오랜 동안 확립된 전통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사들은 하루의 고된 훈련을 마친 후 따뜻한 일반 가옥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다음 날의 훈련을 위한 재충전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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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 시절 제일 추운 겨울 2주간 동계 훈련을
나간 일이
있었다.

배고팠던 그 시절 군도 마찬가지여서 야간에 따뜻한 휴식을 위한
난로나 연료의 여유 있는 지급은 없었고 장병들은 개인 천막에서 추운 겨울 밤을 보내야했었다.

너무 추우니까 장병들은 서 너 명씩 지급된 담요를 모아
덮고 서로 바짝 붙어서 취침했었는데 다섯 장을 덮으니까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지금도 하루 종일 덜덜 떨던 생각만 나는데 이러고 2주가 지나니
희한하게도 일부 장병들에게서 바짝 마르는 증세들이 보였다. 추위에 떨면 몸이 여윌만큼 신체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었다.

중국 동북지방 추운 곳에서 두 달이나 되는 동계 훈련이
가능했었던 것은 이와 같이 민박의 따뜻한 휴식이 있기에 가능했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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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 씨에게 야외의 민박 훈련이 아닌 평소 내무반
[지금은 우리의 생활관] 생활이 어떤지도 물어 보았다.


                       보기 드문 중국 해군 여전사들의 응급 구호 연습장면.


자기가 군대 생활하던 90년대 초반 중국 인민 해방군 내무반은
침실에 8개의 중국식 캉[杭-개인 온돌]이 있어서 겨울에도 추운지 모르고 지냈는데 난방은 석탄으로 했었다.

지금은 동북 지방 중국군의 막사가 거의 3층으로 지은 현대식 건물에 침대로 바뀌었고 보일러로 난방을 한다.

내무 생활은 완전 자치 형태고 군관[장교]들이나 부사관이
들어와서 관물정돈이다 뭐다 하며 간섭하는 일은 좀체 없었고 가끔 간부들이 들어오는 일은 있지만 주로 애로사항을 청취하거나 열심히 하자는 덕담을 하고 가는 수준이었다.

매일 밤 9시에 취침했었고 취침 전 8시 반에 연병장에
집합해서 인원 점검을 하고 이때 전달 사항이나 지시 사항이 전해진다. 아침 기상은 5시 50분이었으며 중대별로 야간 보초 당번은 있어서 각 병사들에게 3일에 한번 정도는 돌아 왔다.

토요일이면 오후 4시 반에 일과가 끝나고
그 다음 날 일요일 오후 4시까지는 각자 자유 시간이었다. 하지만 외박은 허락 되지 않았는데 주말에는 모두 외출해서 집에 편지도 부치고 외식(外食)도 하고 생활 용품도 사고 했었다.

고참들이 군 생활을 오래했다는 이유로 내무생활에서
큰 특권이 주어지는 일도 없다.

김씨를 만나고 중국에 확인 해보니 지금도 중국군의 민박 야외 훈련은 변함없이 실시되고 있었다.

위의 말을 듣고 보면 중국 인민 해방군의 지휘체계에서
관물 정돈이다 일석점호다 하는 사병 통제 수단은 간결화 되고 최소화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 중국군 군장은 얼핏보면 한국군과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다.


현재 배럭[Barrack]이라는 막사에 사는 미군들의 영내
생활에서 내무생활 통제가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하다.[2 명이 작은 미니 아파트 같은 공간에서 기거한다.]

그러니까 엄격한 내무생활이라는 통제 수단을 과감히 축소해
출퇴근 개념을 도입했던 국군 지휘관의 통솔 개념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내가 위에 소개한 중국 인민 해방군의 민박 훈련이
너무 윤색[潤色]되었다고 말할 분도 있으리라.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렇게 느슨한 분위기로 부대 통제와 집중 훈련이 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 온 군 고위 간부가
중국군 장군들이 연중 며칠 동안은 사병들과 같이 먹고 자고 훈련하면서 병사들의 실정을 파악하고 이를 부대 지휘에 반영하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 우리도 한번 시도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던 것을 상기해 보기 바란다.

여기서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을 경망스럽게 인용하고 싶지는 않다.

허나 우리 이웃인 중국 인민 해방군의 민박 훈련이나 다른
내무생활은 확실히 우리가 면밀히 검토해 볼 만한 대상이다.

말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이쯤 하겠다.

그러나 다음 기회에 중국군의 조직 문화에 대해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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