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2편-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 2 편-

유담리에 나타난 전투 경찰의 전투가 우리 전사에서 꼭 밝혀져야할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다.


장진호 서안에서 미 해병들이 잘 싸운 반면 동안의 미 육군은 대패를 당했다. 사진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중공군에게 당한 처참한 현장이다.
- 항공 지원만 믿고 무턱된 행군 후퇴만 하다가 밤이 되자 속수 무책으로 공격당해서 섬멸되었다. 중공군들은 따발총과  백린 수류탄으로 트럭 20대에 나누어 탄 600여명의 미군 부상병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유엔군이 8군의 서쪽 평안도 지역과 미 10군단의 동해안 함경도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는 사이에 큰 간격이 발생하게 되자 중공군은 한반도 중앙의 빈 곳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동서 양익의 유엔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였다.

장진호에 투입한 중공군 9병단 6만 병력은 모 택동의
특별 지시로 만주 지역에서 은밀히 이동해왔다.

6병단은 동쪽에서 전진하는 미 해병 1사단과 서쪽 평안도 쪽으로
전진하는 미 1기병 사단과의 링크를 차단해버리라는 특명을 띄고 있었다.

유담리는 장진호반에서 평안북도로 나가는 갈림길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공군은 해병들을 가로 막아 섰다.

6병단 사령관 송 시륜은 자신이 만주에서 데려온 60,000 명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설치한 겹겹의 포위 자루 안에 깊숙히 들어온 해병들을 도살할 칼을 높이 들고 드디어 살육의 굿판을 열었던 것이다. 때는 1950년 11월 27일 야간이었다.


                                           송 시륜
황포 군관학교 졸업. 모택동의 대장정 때 연대장.
나중에 상장으로 은퇴했다. 대단히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1950년 11월 1일 장진호 입구에서 해병들에게 자신 휘하의 중공군 124 사단이 참패를 당한 복수심으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기도했다.


유담리를 공격한 중공군은 3개 사단, 30,000 명의 병력으로
유담리의 해병 5연대와 7연대 8천 병력을 기습했다.

그날 밤 첫 공격의 위기의 순간을 위의 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 섬에서 광적인 일본군들과 싸웠었고 마산의 진동 전투와 인천 상륙전과 서울 탈환전에서 승리했던 백전노장 5 연대장 머래이 중령은 지옥에서 둑을 터뜨리고 내려 보낸 저승사자들처럼 출현한 어마어마한 중공군에게 적지 않게 놀랐다.

태프릿 중령의 3연대는 이 머래이 중령의 연대에 속했었다.
머래이 중령은 후에 한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당시의 감정을 술회하였다.

“ 교전이 발생한 첫 날 밤에 절망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적군이 사방에서부터 공격해 오는 가운데 부대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이제 우리는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레이몬드 머래이 중령 - 해병 소장시 촬영한 사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세계 최강의 보병이라는 평가를 받은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집단 도살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 번 겪었고 큰 피해는 보았지만 유담리에서 해병대 주력을 격멸해버리겠다는 송 시륜의 시도를 무력화시키고 남쪽 하갈우리 1 사단 사령부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유담리 해병대의 예상 밖의 엄청난 저항에 주눅이 든 중공군은
뒤늦게야 전략과 정보 실수를 절감하고 각각 1개 사단씩을 동원해서 사단 본부가 있는 후방 하갈우리와 유담리에서 장진호 건너에 있는 미 7사단 31연대를 공격하였다.

하갈우리에 가한 중공군의 대공세는 격퇴되었지만 장진호 건너 편
신흥리 쪽으로 전개되었던 미 7사단 31연대의 2개 보병 대대와 1개 포병대대는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다.


         바늘귀처럼 기다란 장진호 동쪽 신흥리에서 미 육군 31연대를 공격하는 중공군.


연대장 맥린 대령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죽었고
뒤를 이어 연대장 대리로서 철수작전을 지휘했던 패이스 중령도 전사했다.

31연대는
치욕스럽게도 연대기까지  탈취 당했다.
이 연대기는 지금 중국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대승의 상징으로 전시중이다.

                                       미 31연대기
          중공군 한 병사가 이를 주워서 보자기로
쓰다가 귀중한 전리품임을 알게 되었다.


미 육군 31연대의 전투의 시작과 끝을 보면 전술의 초심자라 해도 31연대의 전투 지휘의 졸렬한 수준에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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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반에서 같이 싸웠던 해병들은 볼썽사나운 졸전을 되풀이 하고 대패한 육군을 경멸하였고 장진호 전역내내 공공연하게 육군을 경멸하는 풍조가 해병들 사이에서 거의 공론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미 해군 장관이 해병 부대에 타군을 비방하는 언행을 주의하라는 특별  지시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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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 7사단 31연대 전투에서 한국인으로서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다.

미 육군의 각종 기록은 31연대의 섬멸적 붕괴의
원인을
당시 31연대에 배속되었던 700명의 한국 카투사 병들의 저질 전투력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댄다.

카투사들이 전장 공포증에 떨며 전투를 기피하고 도망과
피신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철수 작전을 지휘하던 페이스 중령이 중공군의 거센 공격에 트럭 위로 피신하는 한국군 두 명을 권총으로 즉결처분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전황이 다급했었다지만 너무 가혹한 행위였다.

만약 대상이 미군 사병이라면
페이스 중령이 그런 잔혹한 즉결처분을 했을까하는 인종차별적 야만 행위였다.


                                        페이스 중령


페이스 중령의 졸렬한 지휘로 부대가 처참한 종말을 맺었지만 그가 전사했기 때문에 미 육군은 그를 만고에 없는 명 지휘관으로 만들어서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받게 하였다.

미 육군, 아니 해병들의 모든 장진호 전투 기록을 찾아보아도
장진호 동안[東岸] 육군의 졸전이 오합지졸 한국 카투사 병들 때문이라는 궤변을 부정하는 글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한국 카투사의 탓으로 돌리는 말만 앵무새처럼 그대로 옮긴 글들만 보인다.

31연대 배속 한국인들이 정말로 비겁 행위를 했다면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이들 한국인들은 부산 지역에서 모병해서 미군에게 배속시킨
급조된 군대였다. 대부분의 카투사들은 일본에 가서 편히 지낼 수 있다는 말만 듣고 미군의 모병에 응했다. 이렇게 해서 미 7사단에 배속된 카투사 병은 8,000명이나 되었다.

미 7사단의 카투사들은 일본에서
기초 훈련만 겨우 받고 한반도로 재투입되었는데, 노련한 중공군의 공격 전면에 내세워진 한국 카투사 병들이 입대 4개월 남짓한 신병이라서 그렇게 약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짧은 군복무 기간만으로 그들을 오합지졸로 몰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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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역 2개월 뒤에 한국 훈련소에서 훈련 도중 뽑은 600명의 신병들로 구성된 육본 직할 유격대인 백골병단은 동부 전선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여 두 달 간 남한으로 침투하던 남부군 사령관 길 원팔을 잡아 죽이고 수백 명의 적병을 사살하였다.

비록 절반이 전사했었지만 목표는 달성하였다.

600명의 유격대원이 받은 훈련소 훈련은 단 3주 뿐으로
제식 훈련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기간이 아니었다. 이들 유격대원의 지휘관이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남전에서 유명했었던 채 명신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실제 전투에서 병사들의 훈련기간 보다는 지휘관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1951년 4월 10일 강릉 도립병원에서 생환 기념사진을 찍은 백골병단원.
이들은 단 3주의 기본 훈련만 받고 북으로 파견되었다. 과반수가 돌아 오지 못했으나 60일간 보급도 없이 적진 300km를 기동하며 북한군  중장 길 원팔을 포함한 적 309명을 체포
처단하였고 적 174명을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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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1연대의 비참한 최후를 한국군 카투사 탓으로 돌렸던 미육군 전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장진호 최고 격전지였던 유담리 전투장에 느닷없이 나타나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 경찰의 존재가 더욱 궁금했었다.

이들이 정말 그렇게 잘 싸워줬다면 미군 31연대 패배를 억울하게
한국군 카투사
에게 돌리는 미 육군 전사에 대한 반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막막하던 중에 생각지도 않게 장진호의 한국 전투 경찰에 대
해서 증언해줄 귀인[?]을 만났다.

미국에서 오신 이 종연 박사를 뵙게 된 것이다.
예일대를 졸업하시고 변호사로서 활동하신 분으로 이 분에 대해서 앞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고려대 2학년 재학 중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 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미 1사단에 파견되었었다.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에 존 Y. 리 중위로 소개된 이 종연 박사


남한 내의 작전에서는 머래이 중령의 해병 5연대 파견
연락 장교를 했었으나 장진호 진격 때는 이안 스미스 미 1 사단장의 명령에 의해서 하갈우리의 해병 사단 사령부에 근무했었다.

통역의 기본 업무는 물론 정보 수집도 했었고 포로의 심문과 호송
그리고 사단 지역에 투하된 공수 보급품의 수집 업무를 했었다.

비록 하갈우리의 사단 본부에 있었지만 하갈우리도 중공군의
되풀이 되는 심한 공격을 받았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들을 겪었고 해병 사단 전체가 흥남으로 철수할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던 장진호 전투 참전자이기도 하다.

이 박사와의 첫 대면에 나는 혹시 장진호반에서 한국 전투 경찰대가
미 해병들과 같이 압도적인 중공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일이 있었나를 물었었다.

놀랍게도 이 박사는 그간 안개속의 물체처럼 그 존재조차
아리송했던 장진호반의 한국 전투 경찰대의 활약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그 분은 전투 경찰대의 활약을 확인해주고 이들
해병대 배속 한국 전투 경찰대가 대단히 용감해서 미 해병들의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당시 장진호에서 싸웠던 미 해병 1사단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보병 사단이었다.

이들의 자존심은 대단해서 앞서 말했 듯 미 육군조차 내놓고 경멸했었는데
한국 전투 경찰대가 미 해병대와 어깨를 맞대고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고 싸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해병 5연대에서 싸운 한국 전투 경찰들의 분투는 그 장진호
건너편에서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당한 섬멸적 대패배의 핑계를 다 뒤집어썼던 카투사 병들의 억지 오명을 어느 정도 반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3편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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