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 제4편-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4편-


미 해병 5연대는 1950년 8월 3일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와 트럭으로 창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8월 6일까지 3일간 준비 기간을 가졌는데 바로 이 사흘 동안에 한국 경찰 중대가 해병대에 배속되었다.

이 박사는 전투 경찰 중대가 후줄근한 경무장 차림으로 나타났던 모습을 회고했다.

보병 중대가 당연히 보유하고 있어야할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것도 없었다.
철모도 쓰지 못하고 전투모를 쓴 어수룩한 복장이었다고 한다.


                                       전투 경찰대
자동화기 지급이 없어 공비들로 부터 노획한 데그차레프[떽뚀로프] 경기관총을 주력 화기로 사용하였다. 총신위의 둥근 탄창이 특징이다.


나는 여러 곳의 자료를 뒤지다가 6.25 전쟁 초기에 마산 진동
전선에 전남 도경 경찰이 배치되었다는 경찰 공식 기록을 찾아 낼 수가 있었다.

이후 더 탐문을 해서 함경남도에 배치된 전투 경찰대가
205 경찰 대대라는 기록도 찾아냈는데 북에서 철수한 205 경찰 대대는 12월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대의 창설 부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미 해병에 배속된 전투 경찰대가 전남 도경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하지만 해병 1 사단뿐만 아니라 미 육군 7 사단도 함경도쪽으로
진격했었던 만큼 205 경찰 대대가 미 육군 7사단에 배속된 경찰 대대였을 가능성도 있다. 장진호반에서 피해를 입은 미 육군 31연대도 7사단 소속이다. 7사단의 한 개 연대가 한국군과 함께 혜산진으로 진격하기도했다.

더 찾아보니까
205 전투 경찰 대대는 박 정준 총경이 대대장이고 그 중 미 7사단에 배속된 전투 경찰 중대장은 전 장한 경감이었다.

미 사단에 배속된 전투 경찰이 대개 중대 규모였던 만큼
205 전투 경찰 대대의 다른 중대가 아마도 미 해병 사단에 배속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종언 박사는 한 증언을 한다.
미 해병에 배속된 경찰대원들은 고향이 모두 서울이나 경기도 일대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서울 시경 또는 경기 도경 소속의 경찰일 가능성도 있다.

그 때 경기도청은 지금의 경복궁 앞에 있었다.
전쟁 기념관에서 확인한 한국 전쟁 중 서울 시경 소속 경찰의 전사자는 1,000명이 넘었었고 경기 도경도 500명이나 된다.

하여튼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한국 전투 경찰 부대가 어디 소속인지는
계속 알아
보아야 할 문제 인 듯하다.


                    마가렛 히긴스 여기자가 촬영한 전투 경찰과 공비 사체.
                라이프 지에 수록 된 사진은 거의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들이다.


당시 보병 중대인 경찰 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은 이 박사가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였지만 계급이 경감으로, 그가 부대를 통솔해서 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원들은 다들 나이가 일반 육군의 병사들보다 댓살이 더 많은
20대 중반이었으며 사회생활도 많이 했고 나이도 들어 사리 분별력이 어린 육군 병사들보다는 한 수 위였다고 한다.

 박사가 장진호까지 가면서 살펴보니 이미 결혼한 경찰관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남기고 온 가족들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그 중 일부는 가족과 다시 만났을 때를 대비해서 부지런히 재물을 챙기는[?] 요령도 잘 피우더라는 것이었다.

미 해병 배속 한국 경찰들은 다들 개인적으로 겪은 사정이 있어서였던지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었고 이 증오심이 전투에서 전투력으로 발산되었다.[이들 경찰관들 중 다수의 가족이 빨갱이에게 학살당했을 것이다.]

미 해병 5연대에 있었던 1개 중대 규모의 전투 경찰대는 
5연대 3대대 휘하에 배속되었었다.

3대대장은 머래이 연대장보다 한 살 아래인 태프릿 중령이었는데
그는 낙동강 전투 뒤에 인천 상륙 작전의 선봉대대를 지휘했으며, 서울 탈환 전투에서도 맹렬하게 싸웠고 장진호 전투에서도 제일 치열했던 유담리 전투에서 명인(名人)으로 불러줄 수 있을 만큼 전투를 훌륭히 지휘를 했었다.

그러나 태프릿 중령은 몬타나 주 시골 출신으로 군대에서
말하는 매끄러운 처신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군인다웠지만 아주 고지식해서
상관인 머래이와도 별로 맞지 않았었고 부하들에게도 살뜰하지 않은 아주 깐깐한 사람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군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고 한다.

6.25 전역에서 대활약을 한 해병 고급 장교들은 모두 장군이 되었는데,
그는 대령 때인 1959년 자식이 6명이나 되는데 군 봉급으로는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다는 퉁명스러운 말을 남기고 군을 떠나 체신 부서 공무원으로 전직했다고 한다.

깐깐한 태프릿 밑에 배속된 한국 전투 경찰들은 이 엄격한 미 해병
대대장은 물론 연대장의 기준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 박사는 한국 전투 경찰대가 이미 기본적인 보병 전술 훈련을
수료한 전투 부대였으며, 그래서 별다른 훈련 없이 바로 진동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 해병들과 전투를 하는 중간 중간 기관총 사격같은 추
가적인 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에 최초로 상륙했던 해병 5연대는 마산 인근 진동에서 북한 정예 6 사단의 한 부대와 맞붙어 일격에 대패를 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고성반도를 탈환하고 진주 쪽으로 진격하려했었다. 하지만 낙동강을 건너 영산에 침투한 북한군 4사단을 격멸하라는 지시를 받고 긴급히 이동하게 된다.


                            미 해병 5연대가 싸운 낙동강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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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4사단 중 18연대는 전원 중국 교포로 구성되었었다.
중국 중경까지 진격했었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대로서 개전 전부터 북한군 최강의 부대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부대는 의정부와 미아리 전선을 뚫고 중앙청을 최초로 점령한
서울 입성 부대였으며 한강을 최초로 도하했었고 오산에서 미 육군 스미스 기동부대를 격파했던 정예 부대였다.

4사단 18연대의 1개 대대는 대전과 영동의 후방선을 차단하여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윌리엄 딘 소장의 미 2사단을 붕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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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5연대에 긴급히 혈전장인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호걸” 머래이 중령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들며

“이제야 말로 해병의 맛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며 반기더라고 했다.

이 사실은 그가 미군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북한군 사단이
4사단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북한군에게 입은 굴욕을 되갚아 줄 기회를 갖게 되자 기뻐서 환호했으리라.

머래이 중령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후 영산과 오봉리 반격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해병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그는 남자다웠고 한국인에 대한 편견도 전혀 없어서 이 박사와
다른 종군 한국인들을 동생처럼 대했으며,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도 온후한 성격에 신앙심도 깊은 인물로 한국인들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인천 상륙작전 때의 스미스 장군[ 왼쪽]. 오른쪽은 함대 사령관 도일 제독.


반면 인천 상륙작전 함대의 기함인 맥켄지 함에서 만난 맥아더 원수는 어지간한 초급장교들이 경례를 붙여보았자 아는 척도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저지한 해병들은 함대로 인천으로
이동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한국 전투 경찰대는 서울 서부, 현재의 서강 대학교 뒷산인 노고산과
연세대학교 뒷산인 안산을 잇는 가칭 스미스 능선을 주저항선으로 삼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북한군 25여단을 격멸하는 임무가 주어진 해병 5연대와 함계 서울의 중심으로 진입하였다.

5연대는 북한 25여단을 격멸시켰지만 서울 공격 3개 해병
연대 중에 최대의 피해를 입은 해병 부대가 되었다.


             서울 서쪽 능선에서 부상 당한 미 해병들이 판초우의에 의해 후송되고 있다.
서울 서대문 - 구파발 사이의 서쪽 능선은 서울 탈환의 최대 격전지였다. 해병 5연대는 한국 해병대와 같이 이 능선의 연희고지를 공격해서 탈환한 부대다. 서울 방어 북한군 25여단은 이 능선에서 1,500명 이상의 인원 손실을 입었다.


서울 탈환 후 약간의 휴식을 가진 해병 1사단은 인천에서 
승선해서 동해안으로 파견되었다.


               서울 수복 후 화차를 타고 상경하는 시경 소속 전투 경찰대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전투 경찰대가 경인지방에서 근무하던
경찰들이었다면 여기서 미 해병대를 떠나 본래의 경찰 행정 임무로 돌아 가야하는데 계속 미 해병들을 따라 장진호까지 올라가는 북진에 동행했었다는 점이다.

경찰 중대가 서울이나 경기도 경찰국 소속이 아니었거나
전투 경찰들의 전투 능력을 신뢰한 미 해병대가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나하는 추리가 가능성 있어보인다. (5편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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