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必死卽生, 必生卽死






충무공의 必死卽生, 必生卽死


- 즉결 처분권을 발동하게 만든 탈영 장수 배 설

 

충무공 이 순신 제독이 했다는 유명한 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기를 꾀하며 싸우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충무공 이 순신


이 유명한 말씀은 현대 한국의 군대에서는 물론이고 스포츠계
또는
경제계, 정치계에서도 '투지'를 다짐하는 훈시에 단골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말하기에 비장하고 듣기에는 장렬한 위의 명언은
그 진정했었던 뜻이 무엇인지 별다르게 살펴보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유명한 충무공 말씀의 역사적 배경과 전략적 타당성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려고 한다.

이 말씀은 명량 싸움을 하루 앞 둔 1597년 9월15일,
우수영에 정박한 13척의 조선함대 기함에서 충무공 이 순신 제독이 간부들을 모아 놓고 한 말이다.

상황은 왜의 함대 300 여 척이 몰려온다는 정보에
함대 상하 장졸들 사이에 극도의 불안감이 퍼져 있었던 시점이다. 충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으므로
우수영 앞 바다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서약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卽生, 必生卽死]했다. -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말이다."

충무공이 전투를 앞두고 죽기를 결[決]하고 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정신 훈화를 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남해 서쪽 끝 울돌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명량해전


지금 그분의 말씀이 바로 그런 목적으로 인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살펴 볼 일이 있다.
충무공은 자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 얼핏 생각하면 그저 덕담 수준인 이 훈시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훈시용 미사여구라면 절대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뼈가 될 내용이 이 말에 들어있었다.
더 잘 찾아보자.

충무공이 윗 말에 이어 계속해서 한 말이 있었다.

“ --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고 마음먹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마땅히 군율대로 시행하겠다--. 그리고 두세 번 엄격히 공동 서약을 했다."

그날 충무공이 한말의 앞부분은 널리 알려졌지만
위에 소개 된 뒷 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뒤의 말이 결전을 앞둔
그 날 훈시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이 유명한 말은 결코 지금처럼 후손들이 잘못 알고 남용하는 훈시용
목적의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죽음을 위협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너희들이 비록 장교급 간부들이지만 전투 중에 살기를
도모하는 적전(敵前) 비겁행위자가 있다면
내가 직접 처형하겠다는 말이다. 즉, 전장에서 통용되는 막말로 말한다면 적에게 안죽으려고 비겁한 짓을 하는 놈은 간부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추상같은 군령 발동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충무공은 그의 일기에 능히 담을만한 가치가 있는 위의 속내용이 있었기에 자세히 기록해놓았던 것이다.

량해전 전후를 살펴보면 이를 더욱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먼저 충무공을 전략 면에서 다시 보자.


1.진짜 전략가 이 순신 제독.

충무공은 왜군을 상대로 23전 23승을 한 명장이다.
그 분처럼 병법을 치밀하게 구사한 분은 보기 힘들다.

충무공이 병법서를 말했지만 병서 중의 병서인 손자병법을 들여다보면 이 유명한 병법서, 모택동의 유격전술과 리델하트의 전격전 이론을 탄생시킨 원전(元典)은 정 반대의 말을 한다.

“죽기를 결하고 전투에 임한 자는 반드시 전사하기 마련이고
살기를 꾀하고 전투에 임한 자는 반드시 포로가 되기 마련이다“

병법을 아는 충무공은 당연히 이 내용을 알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 분은
겉멋이 든
미사여구나 늘어 놓으며 병법의 기본도 없는 전쟁을 하는 무지한 아마추어 장수는 절대 아니었다.
[히틀러가 이런 식의 엉뚱한 작전을 일선 부대들에
강요하다가
멸망했었다.]

명량 전투는 기적의 전투였다.

충무공이 건설했던 조선 수군의 함대 100 척의 병선은 원균의 지휘 아래 무리한 진격을 했다가 거제도 칠천량에서 왜군의 야간 공격에 전멸해 버렸고, 경상 우수사 배 설이 겨우 끌고 탈출했던 10 척의 병선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나중에 3척 더 회수해서총 13척.]

1597년 9월 16일,
이 울돌목의 조선 함대에 쇄도해온 왜의 병선은 왜장 도오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함대로서 무려 333척이나 되었다.

이 중에 전투선이 30%[133척?]고 나머지는 수송선이었다.
일본측 사료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병선과 전투선의 구별이 애매모호한 그 무렵의 선박 구조에서 어느 정도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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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은 이 울돌목이라는 천혜의 요지를 단 13 척의 병선으로 적 300 여 척의 대 선단과 결전할 장소로 택했다.

조선 수군에 병선이 충분 했었다면 충무공은 이런
위험성
큰 전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해의 마지막 출구이고 서해의 입구인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국운이 위협받는 전략의 요지였다.

장수는 때로는 승패를 떠나서 죽을 운명임에도
피할 수없이 전투를 해야
할 장소와 시기가 있다. 울돌목이 그런 요지였다.

충무공이 피할 수 없는 전투장으로서 좁은 명량 해협을
택했던 것은 적군은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중하라는 손자병법에 충실했던 것이다. -아군의 합력(合力)으로 적의 분력(分力)을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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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의 흔치 않은 그림


결국 왜의 함대는 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가 조선군에 생포되어 목이 잘렸고 병선 31척이
격침당한 뒤 물러났다. 서해안을 돌아 북상,한강에서 육상의 왜군과 결합한다는 큰 전략도 실패로 끝났다.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당일 즉시, 충무공은 임진란
7년 동안의
작전에서 유일했던 장거리 도피를 단행했다. 대 패배로 절치부심한 적 함대가 당일 야간이라도 보복 공격을 가해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울돌목 해협으로 들어오지는 않으리라고
전망되었고
틀림없이 정탐선을 풀어서 서남해안 진도 일대 포구나 해안을 샅샅이 뒤져 조선 함대를 발견해내고 대군을 동원해 덮쳐 올 것이었다. 조선함대는 여기에 뾰족한 대응 방법이 없었다.

소함대로서 울돌목 같은 천혜의 요지에서 싸울 수없는
이상 최선의 방법은 36계 줄행랑인 도피 밖에 없었다.

충무공의 판옥선들은 서해로 바로 빠져 나와서 당사도, 어외도,
법성포, 흥농 앞바다, 위도를 거쳐 해전 나흘 뒤인 21일, 금강 앞바다인 현 전북 고군산 군도에 도착했다.

함대는 이곳에 잠복한 뒤 계속 정찰선을 내보내 서해에 왜군이
없음을 발견하고 다음 달 10월 3일 고군산을 떠나 다시 조심스럽게 남해 보길도의 새 근거지로 돌아 왔다.



                           왜 함대 사령관 도오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충무공의 샌드백으로 한산도 해전 등에서 연타 당했으나 칠천량에서 원균 함대를 격멸했다. 명량 해전은 이의 복수극이라 하겠다.

처세의 달인이며 일본 전국 시대 주군을
여러번 바꾸는 변신으로 75세까지 장수했지만 충무공의 공격과 말년에 찾아온 맹인이 되는 병만은 극복하지 못했다.

- 이 충무공의 샌드 백이었지만
기막힌 처세로 메이지 유신까지 가문을 보전한 이 인간에 대해서 언제인가는 글을 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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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 적보다 압도적인 전력이 있으면 공격하고 대등하면
적의 허점을 찾고 전력이 열세면 성에 의지해서 방어하고 압도적으로 열세면 도피하라고 되어있다.

도피라는 단어는 구 일본군 작전에서 금기시했던 단어였다.
일본군은 후퇴나 도피를 전진[轉進]이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충무공은 열세인 형편을 정확히 직시하고
도피해 버린 것이다.

함대 보존을 위한 이 장거리 도피를 보면 그의 명언 속에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必生卽死같은 고지식한 미사여구의 분식[粉飾, 내용이 없이 거죽만을 좋게 꾸밈] 따위는 아예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수 있다.



2. 엄격한 리더십의 충무공.

충무공이 부하들에게 비겁자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고 부하들이 이 말에 떨었던 것은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 분의 지휘통솔 면면을 먼저 보자.

이 순신 제독은 영웅적인 구국의 공적이 너무도 크기에 한국사의 위대한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고 현대 한국인들은 그 분을 예수나 석가 같은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이미지로 느끼고 있다. 성웅(聖雄) 이 순신이라는 옛 영화 이름이 그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충무공은 무인으로서 강직하기 짝이 없는
면이 있었다. 군 부대를 추상(秋霜)같은 무위(武威)로서 장악했다.

충무공은 왜의 함대를 맞아 첫 출전을 할 때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있던 여도 권관 황 옥천을 효수(梟首)해버리는 '군기 잡기'를 시작으로 상하를 막론하고 군법 위반자를 단호히 처단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

탈영이나 비겁행위자, 부역자, 유언비어 유포자나
부녀 추행자에 대한
응징은 무서웠다.모두 참수형이었다. 이 분이 사정없이 처단하겠다는 군령을 내리면 반드시 피바람 분다는 것이 부하장졸들 사이에 각인된 인식이었다.

승패는 고사하고 생사조차 기약할 수없는
출전을 앞두고 장수들의 비겁 행위를 철저히 방지하고 다짐해 두어야 할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자연 엄격한 리더십이 발동될 수밖에 없었다.

 


 

                                   왜의 주력함 안택선.



3. 원균 패배 뒤 조선 군관민에 팽배했던 패배의식.


여기에 더한 현실적 배경이 있었다.

충무공이 선조의 미움을 사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하던 그
 해 7월,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이 발생했다.

전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조정은 충무공을 복직시켰고 이후 충무공은 전라도 지역의 주요 요충지를 돌면서 병기와 병졸들을 모으며 만신창이가 된 함대를 다시 재정비했다.

충무공이 병력과 무기, 식량들을 모으기 위해 수하 장수들을 이끌고 구례, 고성, 옥과, 순천, 낙안 등을 방문했을 때는 대부분의 지방 수령들이 모두 도망치고 고을이 텅텅 비어있었는데 고을 관아와 군수품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주 해버리기도 했고 그 짓도 못하고 황망히 도주하기도 했다.

길에는 피난하는 난민들로 붐볐었다.

충무공이 본 것은 관민 사이에 일고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panic]였다.

칠천량에서 수군이 전멸해버리고 조선이 믿는 바다의 방벽이
없어지자 조선에 돌기 시작한 것은 왜군의 상륙과 잔악행위에 대한 공포심과 패전의식뿐이었고 함대 수군들 사이의 상하에도 이런 패배의식이 상식화 되었었다. 이런 함대를 지휘하게 된 이 순신 제독의 심정은 어땠을까?

패배주의가 만연된 국가나 군대는 한층 더 강한 리더십을
요구한다.

따르는 자들에게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부정적인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응징을 하는 것이 위기시의 리더십이다. 이것이 즉결처분 군령 발동의 현실적 바탕이 되었 것이다.
 

 

                          공중에서 본 울돌목.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


4.즉결처분 발령의 계기가 된
경상 우수사 배 설[裴楔]의 탈영.


이 즉결처분 군령을 발동하지 않으면 안 될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 말한 현실적 배경이 있었는데다가 충무공이 출전에 앞서 적전 비겁행위나 도망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정한 즉결처분의 군령(軍令)를 세우겠다고 결심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인간이 나타났다.

앞에서 말했었던 원균 휘하에서 경상 우수사를 했던
배 설
[裴楔]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임진왜란 최대의 위기에서 큰 수훈을 세웠다.
칠천량 해전에서 싸웠던 그는 사태의 불리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휘하 판옥선들을 이끌고 탈출해 나왔다.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이 판옥선들로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이들 병선마저도 없었으면 왜의 대군은 서해로 몰려 들어갔을 것이고 육지의 왜군과 합세해서 임진왜란의 형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음지의 큰 공을 세운 배 설이지만 불타는 칠천량의
전장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전쟁 공포증에 걸렸다. 전쟁 때마다 이런 자들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임진왜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아마 무인에 걸 맞는 강인한 성격을 갖추지 못한 용렬한
인간이었던가, 아니면 칠천량의 패전의 끔찍한 모습이 너무도 깊은 충격을 주었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장 와카사카 야쓰하루[脇坂安治].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으로 시스가다케 7본창 패거리의 맞형이다.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하고 어느 섬에 표류, 해초로 연명했었다.
나중에 육전에 참가해서 용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행주산성에서는 화살 여러 발을 맞고 패주했었다.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 양쪽에서 패배를 맞본 드문 왜장이다.

히데요시 가문을 배신했으나 나중에 도쿠카와에게
미움을받아 자결했으며 두려움과 미움과 경탄이 뒤섞인 글로 충무공을 회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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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그는 백의종군을 벗어나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된
이 순신 제독에게 첫 대면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충무공은 한 눈에 배 설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읽고 있었다.
명량 해전이 있기 전 난중일기에 배 설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모두 그가 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난중일기에서 그 것들을 보자.

1593년 8월 12일.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경상수사 배 설이 황겁해했던 꼴을 들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8월 18일.
회령포에 갔는데 수사 배 설은 뱃멀미를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8월 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임금의 명령서]에 숙배했는데 배 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오만한 태도가 말 할 수 없기에 수영의 아전을 곤장 때렸다.

8월 27일.
배 설이 보러 왔는데 두려워하는 빛이 많았다. 내가 수사(水使)가 피하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8월 28일.
적선 8척이 뜻 밖에 들어오자 여러 배들이 겁내고 두려워하였다. 배 설은 달아나려고 했다. 내가 꼼짝 않고 호각을 불며 기를 흔들고 하여 뒤쫓아 가자 적선이 물러갔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배 설이 달아났다.


위에서 말한대로 배설은 8월 30일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벽파진의
배에서 내려 도원수 진영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도망쳤다. 명량해전 2 주 전의 일이다.

현대 해군의 함대 사령관격인 자가 탈영을 해버렸으니
충무공의
격노와 불안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압도적인 대병력의 내습이 걱정되는데 전투 중에
배 설 같은 인간이
한 명만 더 나와도 함대는 망할 것이다. 배 설이야 말로 역사적 충무공 명언 탄생의 직접적인 동기 부여자라고 할 수가 있다.




살기를 도모하고 전투에 임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앞의 말이 즉결처분의 군령 발동이었다는 사실을 바로 증명해주는 일이 치열한 전투 중간에 발생했다.

명량 싸움의 절정에서 충무공은 비겁행위를 하는 한 장수를
본보기로
즉결 처분해버리려고 했다. 대상은 중군[中軍]의 김 응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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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은 축구의 센터와 같으며 군 집합시 기준과 같다. 횡대의 충무공 함대는 중군 김 응함의 병선을 기준으로 진퇴의 기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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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은 난중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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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들이 마구 몰려들자 장졸들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나는 앞으로 내달으며 지자총통, 천자총통과 여러 가지 총통을 마구 쏘게 했고 뱃전에 빽빽이 늘어선 사수들이 비 오듯 화살을 날렸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나 관망하면서
나아가지를 않았다.

배를 돌려 곧바로 중군 김 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의 목을 베어
높이 내걸고 싶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더 가까이 달려들게 되어 사세가 낭패를 볼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초요기[招搖旗]를
세우게 하고 그랬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 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살려고 달아나고 어디를 가겠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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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무공이 토하던 무서운 절규의 질타라 아니 할 수없다.

적세에 겁을 먹고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충무공의 대노에
더 겁을 먹고 적 함대에 죽기살기로 돌격했고 다른 병선들도 이를 따랐다.

늦게나마 돌격 명령에 복종했던 김 응함은
처형을 면했다.

명량해전에서 왜의 함대는 대파가 되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충무공은 비상한 각오와 지휘,그리고 절묘한 전술로 적을 물리쳐 서해로 들어가는 문을 굳건히 지켰다.


  

  지금의 울돌목- 폭 300 미터이나 암초때문에 실제 항해
가능 폭은 100 미터를 조금 더 넘는다.


명량해전은 정말 제2의 배 설 같은 적전 비겁 행위자가 나왔으면
질지도 몰랐을 긴박한 해전이었다.

이를 비상한 병법과 비장한 지휘력으로 극복해서 이긴
충무공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충무공의 말대로 살기를 꾀하는 자는 필히 죽을 것이다라는
말은 탈영병 배 설에게 정확히 적용되었다.
적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군법에 따라 된 것이다.
배 설은 탈영 후 여기저기 객지를 전전하며 체포를 피해다녔는데 군령 발령자 충무공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 한 뒤 안심 한 듯 경상도 선산의 집에 돌아 와 있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족쇄를 찬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599년 3월 참형에 처해졌다.

그가 명량해전에 충무공 말씀대로 죽기를 결하고 출전했었더라면
살아 남아서 승진도 하고 주어진 일생을 다 잘 살고 와석종신[臥席終身, 제 명(命)을 다하고 편안히 자리에 누워서 죽음]을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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