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케이블 방송 Channel-J에 일본 메이지 유신 때 큰 활약을 했
던 사카모토 료오마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실제 인물을 충실하게 표현하고자 곱슬머리 분장까지했지만
배역 배우들의 중량감이 실물에 영미치지를 못한다.]

 

           

                                       사카모토 료오마
                                거구의 당당한 체구였지만 근시였다.


일본 야후와 소프트 뱅크의 사장인 손 정의씨가 인터뷰 중에
사카모토 료오마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을 만큼 일본에서 유명한 인물인 그는 도오사 번(藩)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도쿄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서 수학했던 검술의 달인이다.

그는 개방에 뜻이 있었고 일본 해군의 모태인 해원대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최대 공로는 일본 최초의 해군을 창설한 것이나 최초의 주식회사형 무역회사를 설립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도쿠카와 막부에 반기를 든 조오슈와 사쓰마 두 번(藩)의 연합을 중재해서 성공시킨 것이다.
[두
번(藩)은 연합 전에는 서로 전투를 벌일 만큼 개와 고양이와 같은 사이였다.]
 


                                                  일본에서는 잘 알려진 사카모토의 연인 오료
            후에 결혼하여 일본 최초의 신혼 여행을 다녀온다. 사카모토 사후 재혼했지만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사카모토는 명치유신 성공 직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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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는 검술의 달인이었음에도 소형 권총을 가지고 다녔었다.
 
조오슈 지사 다카스키 신사쿠가 선물한 것으로 그가 습격당했던 데라다야 격투에서도 이 권총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평소 사카모토가 사용한 권총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사카모토의 S&W  모델 1, 22 short 호신용  권총
유연 화약으로 발사되어
 위력은 약했으나 급소에 명중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었다.  포켓 피스톨의 원조 격이 되는 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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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 지역의 조오슈, 사쓰마 두 번이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하여 250년간 계속되었던
도쿠카와 막부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형 총기들이 한 몫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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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467년 오닌의 난[應仁の亂)이래 100 여년 간 60 여 개 국가로 나뉘여져 밤낮 없는 전쟁을 벌였었다.

전국 말기 나타난 오다 노부나가가 거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막바지 시점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조선을 침략했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다.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추종파들과 벌인 일본 최대의 전투인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도쿠카와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편을 동군, 도요도미 히데요시 추종 세력의 편을 서군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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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를 근거로 했었던 조오슈의 모리 가문은 서군 편에 섰다가 패전 후 세력이 휠씬 축소되어 당시 일본 변방인 서남쪽으로 쫓겨났다.

사쓰마도 서군에 섰지만 참여의 정도가 적어서
번주 시마스 요시히로가 은퇴하는 정도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두 번(藩)은 250년 동안 막부로부터 찬밥 취급을 받으며 내심으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다.

거의 견원지간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오슈와
사쓰마는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후에 도오사 번도 참여]한 뒤에 본격적인 막부 토벌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천황을 모시고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막부 토벌 운동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천황을 모시고 국가를 개방하여 실력을 쌓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죠오슈나 사쓰마는 막부 시절 서남쪽 변방의 세력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남쪽에서 밀려오는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있게된 것인데, 덕분에 일본의 어느 곳보다 일찌기 서구문물에 눈을 뜨고 이를 받아들였다.

사쓰마는 환경을 최대로 활용하여 부[富]를 축적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쓰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라는 명군[名君]은 서양 기술을 대폭 수용하여 서양식 방적 공장까지 건립하는 정도가 되었는데 사쓰마는 1609년 일찌기 유구국(오키나와)을 점령해서 이곳의 산출물인 흑설탕을 일본 전국에 팔아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사쓰마 번에 돈을 벌어준 것은 조선의 남원에서 몽땅 잡아 온 도공의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였다. 중국의 도자기 생산 중심지인 경덕진이 태평 천국의 난으로 유린되자 서양의 도자기 무역업자들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려 일본 도자기를 붙티 나게 유럽으로 실어 내간 것이다.

중국 상하이와의 밀무역도 조오슈나 사쓰마의 돈줄이었는데
이런 돈벌이로 사쓰마는 서남[西南]의 웅번[雄藩]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돈이 쌓이자 사쓰마는 최신 병기를 사들여서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는데 그 중심은 프러시아제(독일제) 후장총[後裝銃, 탄약을 총의 뒤쪽에서 재는 소총]인 게베르[GEWHER] 소총이었다.

당시 일본에 많이 들어와 있던 무기는 전장총[前裝銃, 탄약을 총구(銃口)에 재는 소총]인 프랑스제 미니에 소총으로 사격하는 병사는 총을 세우고 뻣뻣이 선채 총구 안에 실탄을 밀어 넣어야했다. 총탄이 난비하는 전장에서 이렇게 서서 장탄한다는 것은 피탄[被彈]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짓이었다.

 

                                                             미니에 라이플로 무장한 프랑스 군
미니에 총은 영국 엔필드나 미국  스프링필드 총의 원조가 되었지만 이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게베르 소총인 DREIYSE 총으로 무장한 프러시아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반면 더 신형인 게베르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총신 후미에 장탄[裝彈]이 가능했기 때문에 은폐 엄폐가 가능해 미니에 소총에 비해 절대 우세하였다.

경제력이 좋은 사쓰마는 후장총인 프러시아제(독일제) 게베르 총을 대량으로
수입, 이를 주력화기로 무장했고 게베르 총을 조오슈에 원조하기도 하였다

 

                                                   프러시아제 게베르 총 - DREYSE NEEDLE GUN


결국 일왕[日王]을 등에 업은 사쓰마, 조오슈 군과 막부군 사이에 무진전쟁이 벌어졌고 막부군은 패배해서 250년 막부 정치의 문을 닫아야 했다.

무진전쟁에서 관군[官軍-실제로는 사쓰마, 조오슈 연합군]
은 주로 프러시아제[독일제] 무기를 사용했었고 막부군은 프랑스제와 미국제 무기를 주로 사용했었다.

그런데 패배한 막부군의 무기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에노모토가 지휘하는 막부군의 패잔병들이 호카이도의 하코다테로 물러나 저항할 때의 전투 상황 기록을 보니 도쿠카와 병사가 미제 스펜서 카빈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펜서 연발총 - 5발 연발.


스펜서 카빈은 남북 전쟁에서 출현한 연발총으로 사거리와 화력은 약했지만 연발 사격력으로 단점을 극복했던 총기였다.

이 스펜서 카빈은 일본에서 무진전쟁으로 왕정이 복고되고 나서 불과 몇 년 뒤인 1871년 신미양요 때 조선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 나타난다.

또 다른 무기도 있다.

반 독립적 위치에서 관군에 저항하던
나가오카 번이 개틀링 기관총으로 관군을 공격했었는데[나중에 조오슈 군벌의 우두머리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기관총 사격에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이 개틀링 기관총은 뒤늦게 조선군에 수입되어 1894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대패하게 하였다.

 

                                                                           개틀링 기관총



일본은 메이지 유신 중에 서구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그 와중에 자주 국방을 위한 주요 무기의 국산화에 힘을 쏟았다.

최초의 일본 국산총인 무라다 소총은 당시의 최신이었던
독일의 모젤 총을 카피한 것이다.

풍운 급박한 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적어도 일본은
무진전쟁이라는 내전의 단계에서부터 세계 일류의 총기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폐쇄적인 은둔 국가로 살아가던 조선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군과 미군들에게 대항 하는 무기로 내세웠던 것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휴대했던 화승총에서 단 일보도 발전하지 못한, 화승총 그대로였다.

 

 
조선의 포수들과 화승총. 관광용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는 조선도 일본의 신무기에 맞서 비격진천뢰, 화차, 화포 등의 여러 무기들을 사용했었는데 병인양요 이래 프랑스군, 미군과 대결하고자 한 대원군이 내놓은 무기(?) 라는 것이 척화비[斥和碑]였으니 조선이 국제 정세와 과학 기술을 외면한 채 얼마나 깊은 수면에 빠져 들었었는지를 짐작 할 수가 있다.

그후 일본에 농락 당했던 역사를 되집어 보면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같은 시기 호전적인 민족인 일본이 본격적이 개국정책 실시 이전 자기들끼리의 내전에서부터
세계의 최첨단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조선에게 침략의 미래가 오고 있다는 안 좋은 징조를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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