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꼭 한번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 터키 참전용사 에민할아버지를 만나다.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불리는 6월.. 이제는 조금은 의미가 희미해져 가고 있고 예전같이 6월25일에 특선 영화들이 하루종일 방영 되는 시기도 아니게 되었지만, 불과 50년 전에 이땅위에 수많은 젊음이들이 "자유,평화" 라는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그 "단어"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는것을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극동에 나라에서 생명을 걸고 그 "단어"들을 위해 젊음을 걸었던 외국인 참전용사들이 있으셨다는것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기사를 써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GAZI - 터키어로 "참전용사를 칭합니다 그리스 독립전쟁,한국전 2가지 전쟁에 참전한 분들을 통칭합니다"

2003년 기자는 터키에서 몇개월간 체류하면서 사진 작업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터키군 참전용사 촬영역시 그 일중에 하나였는데, 자료 조사라던지 실태 파악등에 일이였는데, 하지만 막상 그 일을 진행하면서 느낀것은 당혹스러움 이였습니다  참전용사는 있으신데 실제로 만날수 없는 분들..주변인이라던지 가족등은 만날수 있었지만   실제 본인을 만나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가짜 참전용사를 만나기도 하고 - 한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참전용사라면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해서 찾아가보면 웃으면서 기념품을 팔려고 하기도 하고, 인사동에 자주 오시는 "터키 참전용사" 분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기본적인 자료조사 정도로만 만족하고 정리해 가던 시점에 터키에서 유학중이던 지인에게서 "터키 중부에 있는  한 도시에서 아는 분이 참전용사를 만났다고 하던데? 한번 가보지 않을래?" 라는 말에 기자는 멀고도 먼  "아피욘"으로 떠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미 많은 실패를 본지라 큰 기대없이 일에서 벗어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떠나게 되었고 저녁 9시쯤 출발해서 다음날 정오쯤에 "아피욘"에서도 한시간을 더 들어가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것은 "축제" 와 대부분에 주민이 처음 본다는 외국인을 보는 "호기심" 이였습니다, 마을은 작은 축제를 열고 있었고 정오에 태양밑에 주민에 대부분이 모여있었고, 그곳에서 정말 "따뜻한 환대" 를 받았습니다
라마잔 기간이였지만 점심을 대접받고 학교 영어선생님에 안내로 "에민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오래된 듯한 집에 할머니와 손녀와 같이 사신다고 하시는 에민 할아버지, 처음 뵙는 인상은 단단함과 맑은 눈빛이였고. 다행히 영어선생님이 계셔서 영어 와 터키어가 혼용으로 인터뷰가 진행이 되었고. 실제하는 "참전용사 - GAZI"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민 할아버지는 1950년 10월에 파견된 1차 터키 보병 여단이 한국에 참전하면서 부터 전쟁 말 부상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한국전에 대부분을 겪으셨던 참전용사 이셨습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은 1,2,3차 로 나누어서 15000명정도에 참전을 합니다, 이 숫자는 미국 영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파병한 국가이며 전사 721명 부상 2147명 실종 175명 포로 346명의 인명 손실을 겪었습니다



1950년 8월경에 필리핀으로 이동해서 훈련을 받고 오키나와로 이동해서 10월경에 한국전에 참전하시게 되었고 지금도 기억하는 지명은 "부산","대구","용인" 등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용인지역에 무척 힘든 전투를  겪으셨다고 하시면서, 총검을 하고 백병전을 벌리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면 당시 참혹했던 전투를 이국땅에서 찾아온 "한국인"에게 설명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CAl 30. 사수로써 참전을 하셨고 "너무 무거워서 버리고 가고 싶었다니깐 " 이라고 하시면서 즐겁게 웃으시기도 하고, 전사한 전우들에 이야기를 하시면서 - 작은 마을이고 이웃이였던 전우가 많아서 전사를 하면 무척 힘들었다고 옛일을 생각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세계적으로 어려운 동계전투였던 -장진호 전투- 에 참전하시고 그곳에서 팔에 부상을 당하셔서 사카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터키로 돌아오셨다는 대목에서는 한참이나 생각을 하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아마도 젊었을때 목숨을 걸고 지키고 가질려고 했던 그 무엇과 그리고 현재를 생각하셨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더 나이가 든 요즘에서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어-터키 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여서 중간중간 해당 단어 나 설명을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할아버지에눈빛이나 행동으로 그 뜻들은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어떤 기분이셨나요?"
"해외에 나가기 힘들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었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떤 상황인지도 몰랐어 하지만 나쁜놈들을 혼내주러 간다는 이야기에 지원을 하게 되었던거야,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어, 더 많은 한국인들을 도와주고 싶었고 , 도와줄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한거지 그리고 한국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인터뷰 말미에 "한국으로 많은 참전 용사 분들이 오시는데 한국에서 초청 받으신적은 없으신가요?" 라는 질문에 "너무나도 가고 싶었고, 지금도 너무 가고 싶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갈수가 없어.."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대구"에 꼭 가보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유를 여쭤보니 당시 전쟁고아를 위해서 대구에 고아원을 동료들과 함께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아원에 이름을 여쭤봤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셔서 한국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던중에 당시 한국전 고아를 위해 만들어진 고아원들이 터키 참전용사 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만드시거나 도움을 주셨다는 자료를 보고..다시한번 숙연하게 만들어지는 대목이였습니다. 다시 한번 꼭 찾아오기로 하고 떠나온 2004년 아피욘에 작은 마을에 계시던 에민 할아버지.. "너는 한국에 에민이다" 라면서 터키 이름을 지어주시고 장미 한송이를 꺽어서 옷에 꼽아 주시던 에민 할아버지 당시 인터뷰 내용이나 사진이 전시회나 책으로 쓰인다면 꼭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저역시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약속입니다.. 언제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전하면 미국을 많이도 생각하게 됩니다, 전쟁후에 많은 지원을 받아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의 기억속에 희미해 지는 국가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에민할아버지에 나라인 "터키" 역시 월드컵으로 "형제에 나라"라면서 매스컴에서 떠들석 했지만 지금은 점점 우리의 기억속에 희미해 지고 있습니다. "자유,평화"를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에서 생명을 걸었던 분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지켰던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로만 하는 "자유,평화"가 얼마나 손쉽고 달콤하다는것을 그리고 행동하는것이 얼마나 힘든지 2009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다시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현재 터키에서 많은 수에 참전용사분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로하셔서 많은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유엔군의 기치를 들고
터어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시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

- 터키 참전용사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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