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 중공군 양 근사는 정말 영웅이었을까? -제2편-






중국 특급 영웅  양근사  죽음의 미스테리   -제 2 편-


 

이 사진 전에 올린 기억이 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중공군 병사인데 실탄에  명중하여 부러진 일제 대검이 보인다 . 실탄은 대검을 부러뜨리고 그를 명중했다.


결론적으로 양 근사의 폭파통 자살 돌격은 상식적으로 황 계광의 육체 돌격만큼이나 그 전투 행위가 비이성적이다.

그렇게 죽고 싶었으면 미군들이 진지내로 뛰어들 때 터뜨렸으면 더 효과가 좋았을텐데 일부러 마중을 나간 것도 이상하고 또 한국전에 참전한 그 많은 중공군 중에 고지 전투를 하다가 폭탄을 들고 미군에게 자살 돌격을 했다는 사례는 있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서 미군의 전투 보고서를 들여다 보자.

11월 29일 심야, 자정 넘어 중공군이 먼저 이스트 힐을 공격해 점령했지만 미해병이 곧바로 반격해 한 번에 이를 탈환하였다. 전투는 해뜨기 전에 마감되었다.



 

                        하갈우리 - 중공군 사단  주공은 남쪽에 가해졌고 조공은 북쪽 이스트 힐에 가해졌다.


중국측에 기록된 아홉 번의 공격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 중공군이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정도로 며칠간이나 방어하지도 않았다.

중공군이 공격할 때 이스트 힐에는 미 육군과 소수의 해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갈우리 남쪽을 공격했었던 중공군 주공의 공세가 한풀 꺾일 무렵인 오전 1시 30분, 하갈우리 북쪽의 이스트 힐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다. 미 해병과 육군이 지키던 이스트 힐은 중공군의 공격에 금방 점령당했고 미군들은 산 아래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스트 힐의 한 구석에는 미 해병 포돌락 상병이
부상 당한 채 은신하고 있었는데, 그는 SCR-300 무선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관측에 따라 미 포병들은 정확한 포격을 가할 수가 있었다.

중공군은 이스트 힐을 점령한 여세로 미군 보급품 집적장과 사단 지휘소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미 해병들의 포격에 분쇄되었고 중공군의 공세가 꺾인 것은 오전 4시경이었다.

하갈우리 방어 부대 부대대장 마이어스 소령은 잡다한
행정 부대원들과 육군 낙오병을 긁어모아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이스트 힐에 연해있는 능선을 점령했고 항공 공격과 공병들의 증원을 받아 이스트 힐을 완전 점령하였다.

장진호 전투의 경전격인 '브레이크 아웃'의 저자 마틴 러스는
이 반격 작전에 참가했었던 두 명의 노병들을 만나 이를 재구성했었다.

두 사람은 지휘관 마이어스 소령과 항공 통제반의 그린 일병인데
그들 누구도 중공군의 자살 폭탄 돌격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마이어스 소령은 중공군들이 던진 수류탄의 매캐한 냄새가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했을 따름이다.

중공군이 말하는 아홉 번의 공격은 있지도 않았었고
자살 폭탄 돌격은 더더구나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양 근사가 전선의 북쪽 하갈우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해병들이 총 퇴각하던 때 작은 싸움이 있었던
장진호 입구 황초령에서 죽었다는 증언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국방부 NARA 블로그 '장진호의 난민들' 글에 소개했었던
남파 간첩 김 석형은 그의 구술 자서전에서 그가 양 근사의 시체를 수습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간첩 김 석형
출감 후 그를 후원한 세력 중에 그가 북에서 박살 낸 천주교의
인사들이 많았었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그 서비스를 즐겼다.


다시 설명하자면 함경남도 보위과장인 그가
장진호 전역에 동원된 중공군의 정보며 작전 지원에 적극 협조했었고 또 피난에 실패한 장진호 피난민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썼었다.
 
골수 공산당인 그는 여러 요직을 거치며
편히 살다가 1959년에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고, 90년대 초에 고령으로 석방되어 8년을 남한땅에서 살다가 김 대중 정부 때 북한으로 보내졌다.


장진호반에서 미 해병대를 섬멸하지 못하고 놓친 모 택동은 중공군
9병단 사령관 송 시륜에게 해병들이 탈출해 나가는 장진호 입구 황초령을 막고 모두 섬멸하라고 엄명했고 중공군은 탈출해 나오는 해병들을 막기 위해서 황초령 옆 1081고지 등의 요지에 유개호[有蓋豪]까지 마련하고 해병들을 공격하려 했었다.

모 택동이나 송 시륜은 이 황초령 전투에 크게 기대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은 이미 미 해병의 화력과 엄청난 추위에 두들겨 맞아 전력이 거의 소모되어 공세 종말점에 다가가 있는 상태였다.

장진호 전투 초기부터 공격을 했었던 중공군 79사단과 80사단은
단 6일만에 병력 손실이 극심해서 각 사단이 각각 한 개의 연대로 축소 급편 되었다. 각 연대 병력이 단 1,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병력 손실률이 90%에 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무참하게 격멸 된 전투력으로 어떻게 해서든 철수하는
미 해병들을 격파해서 원을 풀어 보겠다는 욕심으로 계속 미 해병들을 쫓아 왔지만 그런 능력은 이미 고갈 된 상태였다. 황초령이라는 천혜의 요소가 있었지만 중공군은 이를 의지해서도 이렇다할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눈이 쌓인 것을 보니 장진호 탈출 막바지다. 해병들이 점거한 곳이 황초령 일대로 보인다.


그러나 황초령 입구 함흥 쪽에서 장진호로 진입해서 대기하고 있었던 해병 1연대대의 슈먹 대대가 12월 8일 1081 고지를 공격해서 점령해 버렸다. 중공군은 야간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미군의 반격에 전멸해버렸다.

미군의 황초령 공격 때 장진호 작전 중 최악의 동장군이 내습했는데
이 황초령에서 얼어 죽은 중공군의 시체가 참호 속에서 다량 발견되었다.


그런데 김 석형은 이 황초령 1081 고지 전투에서 양 근사가 명예로운 전사를 했고 자신들이 팔 밖에 남지 않은 시신을 수거했다고 했다.


김 석형은 구술한 자기의 자전적 저술인 '나는 조선로동당원이요.'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이 전투가 중공군이 황초령을 공격할 때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중공군이 황초령의 미군 기관총 거점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사상자만 발생하고 공격이 진척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뜻밖에 하갈우리에서 자폭 돌격을 했다는 양 근사가
나타나는데 김 석형이 회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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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원군 중에 양 근사라는 분이 있는데 포병 대장이예요.

양 근사가 그걸 눈으로 보고서 묵과 할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포가 그 옛날 일제 시대 그 포인데 그 놈 쏘면 뒤로 구르기 때문에 포대를 맨들어야 된단 말이야.

그 땅이 다 얼고 하니까
포대를 맹글 사이도 없고 하니까 목전에서 [전투가] 이렇게 벌어지고 병사들이 사라지니까 이 사람이 자기 어깨를 들이대고 포를 쏘라고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포수가 쭈삣쭈삣 대니까

“ 상관의 명령이니까 집행해!”

그래 쐈단 말이야. 쏘니까 그 중기[중기관총] 말이예요,
고것 때문에 황초령을 지금 점령 못했는데 그걸 딱 명중 했단 말이야! 

명중하니까 지원군들이 1차 2차 3차 실패했던 것 와! 올라가
올라가 설라무네 완전히 점령해 설라무네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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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전사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중군 기자였던 손 요걸이 쓴 ‘압록강은 알고 있다.“에 기록된 글이다.

80사단 포병연대 5중대 5분대장인 공 경삼[孔 慶三-쿤칭싼]이다.
11월 27일 저녁 포병진지를 구축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보병 돌격대가 적들의 화력 공세에 눌려 막중한 사상자를 초래하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 그가 어깨로 한쪽 포다리를 떠받치고서 포를 쏘아 30 여 명의 적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발사 지점을 파괴함으로서 부대가 순조롭게 신흥리[덕동고개 부근]로 쳐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고 자기는 죽었다. 

그는 특급 영웅보다 한 등급 아래인 1급 영웅을 받았다.

아마도 김 석형은 그와 양 근사의 죽음을 혼동했었던 것같다.

김 석형의 황초령 회고가 사실과 맞지않고 인물의 전사 배경이
다른데, 그가 80이 가까운 고령으로 기억이 흐리거나 아전인수의 뻥튀기 식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1949년 함경 남북도 일대에 뿌리를 내린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과
투찡 수녀원의 천주교 조직을 뿌리채 뽑아서 60 여 명의 남녀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들을 평북 만포진 밑 산간 마을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내쭟아 5년 가까운 세월동안 28명이나 죽게 만든 과정을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까지 찾아가서 취재한 필자로서는 그의 발언의 신빙성을 상당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의 이야기에서 김 석형의 기억과 신빙성을 상당히 낮게 볼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래에 늘어 놓은 말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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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양 근사하고 포수하고 어떻게 되었는가 ? 그거야 없어.

사람이 다 없어. 사람이 다 없었는데 그 다음에 전부 우리가
거기 대니면서 조각을 좀 주워 봤는데 그 사람 군복 해 설라무네 표시되어 있는 거, 겨우 그거 한 조가리 얻었어.

그러니까 팔 한짝하고.. 양 근사 그 사람이 이제 중국에서
영웅인데 이것 때문에 이중 영웅이 됐어. 여기 한 개 쪽지. 여기 한 개 남았지. 없단 말이야 .

  


                                                                      양근사 영화 
배우 왼쪽 가슴에 이름표같은
것을 달고 있다. 양 근사 팔뚝은 저 이름표 때문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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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더 계속하였다.

그래서 전투에서 이렇게 승리했는데 그 후에 종전이 돼가지고 중국에서 이장을 해가는데 [장진호 전투 전사하여 매장된 중공군 전사자 모두를 이야기 하는 듯] 장진호 전역 중 조선인들이 협조해준 사실에 감사한다고 식품을 세 화차나 가져왔었고 이장[移葬] 추모제를 했는데 김 석형도 참석했다는 회고도 했었다.



 

        

                        심양에 있는 항미원조 열사 능원의 양 근사 묘
                김 석형 말대로라고 하면 여기에 매장된 것은 양근사의 팔뚝 하나다.


김 석형이 추모제에 참석한 북한 사람들에게 중국측이 컵 하나와 수건 하나씩을
주었다는 구체적인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양 근사의 시체를 거두었다면 말이 100% 거짓이나 착각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양 근사라는 한문 이름이 그대로 기록 된 것을 보면 이 노인의 기억력이 완전 맛이 간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양 근사가 포대장이었으며 포를 황초령까지
끌고 가서 직사를 했다는 것은 믿을 바가 못 되고 더구나 포의 반동에 포수와 함께 깔려 죽어 팔 한짝만 남았다는데 이것은 포의 반동에 깔려 죽었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두 구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고 증발했다는 것은 폭파통을 껴안고
자폭하거나 포병 포탄이 직격당해도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 시기에 황초령에서 중공군의 저항은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가 해병대 대대병력에게 빼앗길 정도로 미약했었고 이후 12월 10일부터 해병 1 사단의 대병력이 황초령 고개를 넘어가는 것도 제지 하지 못했었다. 미 해병대의 공중 엄호가 황초령 일대에 집중되어 중공군 포병이 접근할 여유가 없었을 것 같다.


하여튼 전사한 장소가 황초령만 아니라면 추측의 시나리오를
구상해볼 한 전투가 있었다.

그의 기억에서 "양 근사 - 황초령- 포병- 시체 분산- 포수 전사" 등
변수들을 연결해놓고 분석해보자.

위의 변수에서 황초령만 빼면 들어맞는 상황 하나가 장진호 전투에서 나
타난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산포가 나온다.
중공군이 끌고 장진호로 들어온 일제 포는 75mm 산포가 맞다. 이 포는 나중에 중부 전선에도 나타났었고 전쟁 기념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일본 육군의  41식 75mm  산 포 -포신 후부에 직접 사격을 위한 조준경이 있다.


그 포는 '브레이크 아웃'에 서너 번 나타난다.

한번은 1950년 11월 25일 미 해병 5연대 정보 주임이 유담리에서 검문했었던 현지 북한 주민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는 중공군에게 길 안내를 해주고 집으로 가는 참이라고 하며 중공군 대열에 말들이 끄는 포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두 번째 포는 나흘 뒤인 11월 29일 새벽에 얼굴을 보인다.
중공군이 해병대 사령부가 있던 하갈우리를 공격해 왔던 1950년 11월 29일 심야에 바로 양 근사 부대가 점령했던 이스트 힐 근처 산 능선의 길에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 산포 4문 중 한 문이 이스트 힐 산자락에 있는 해병대 탄약 집적소에 포격을 가했다.
 

                                                                            송 시륜
무리한 작전으로 미군 병사들보다 중공군 병사들이 열배 가까이
더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포 방향을 돌려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있던 미 해병 대대 본부에 포격을 했고 이 포격으로 하갈우리 방어 사령관 릿지 중령의 인사 장교가 전사했다.

이 높은 곳까지 포병 포가 올라온 것이 상식적으로 의아하겠지만
장진호 전체가 고원지대니 이런 높은 곳에도 주민들이 왕래했을 산길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중공군 포병들은 낮에 충분히 관측을 해서 탄약 집적소의 위치를 확인해 놓았을 듯하다.

[작가 마틴 러스는 '브레이크 아웃'에서 중공군 포병의 출현 시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스트 힐 일대를 점령한 후가 될 것이다.]


하갈우리 동쪽 얼어붙은 논바닥에 방렬(포병 진지에서, 대포 따위의 화기를 일정한 고각과 방향으로 표적에 지향시키는 것)해있던 해병대 D 포대는 당장 그 중공군 포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힘들었다. D 포대는 105mm 포 6 문으로 편성 되어 있었는데 포대장 스트로멍거 대위는 105mm 포 한 문을 100 미터쯤 슬그머니 전방으로 진출시켜 유인 사격을 했다. 중공군 산포는 105mm 포 사격의 화염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포에 포격을 했다.

  


                                                                    미군105mm 포


이에 중공군 포대 위치를 포착한 해병대 D 포대는 일제 사격을 했다. 여러번 되풀이 하는 연사였으며 이 포격에 중공군 포는 침묵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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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역에서 해병 포병들의 사격술은 정말 신기에 가까웠다.

보병 일개 중대가 적의 연대 규모 공격을 나흘간이나 지켜낸
유담리 하갈우리 사이의 덕동고개 사수도 하갈우리 외곽에서 자리잡고 극한 사거리인 10,000미터 사격 지원을 해준 리드 대위 지휘하 H 포대의 역할이 컸다.

해병 1 사단의 포술은 낙동강 전선과 인천 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탈환작전에서 단련 될대로 단련되어 고수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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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포대 전부와 H 포대의 일부는 이날 이스트 힐 포격에서 1,200발을 사용했다. 200~300명 정도의 중공군이 점령했던 이 좁은 능선 일대에 가공할만큼의 포격량이었다. 또 산 정상 한구석에 숨어 있던 포도록 상병이 조명탄 아래 환히 드러난 중공군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줬기 때문에 포격은 정확했었고 중공군의 피해는 막심했었다.

포가 이렇게 전선까지 진출했다면 보병 방어선 한 중간에
포 위치를 잡을 수가 있고 보병 중대장이 포에 표적 지시를 위해 포병들과 함께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산포들은 좁은 산 고개에 옹색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보병 진지들에 뒤섞여 아주 좁게 방렬했을 것으로 보인다.

포탄이 풍부했던 미 해병 포대가 이 산포 제거를 위해
일제 연속 사격으로 수 십 발을 발사했던 것인데 좁은 지역에 가한 집중 사격으로 낙탄 밀도가 아주 높았을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포탄들이 떨어진 곳에 또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시체들을 가루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양 근사와 포수의 시체들의 흔적이 없었다는 김 석형의
증언과 기막히게 부합하는 상황이 된다. 이 사실은 양 근사가 팔 하나만 남기고 죽고 포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설명을 타당성이 있게 만든다.

수십 발의 포탄이 포 주변에 밀집 낙하했다면
전사체를 산산 조각을 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추리는 했지만 나 자신도 이것이 진실이라고는 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중국에 두 명 밖에 없다는 항미 원조의 영웅 중에 한 명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중국에서 짙어지고 있고 이를 침묵으로 증명해주는 사진도 나왔었다.

중국이 발표한 양 근사의 영웅스런 죽음이 전투 상식에 어긋
난다는 사실, 야간 전투 한 번에 끝난 전투를 과장되게 며칠간이나 계속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있지도 않았던 미군의 공격이 아홉 차례나 있었다는 등의 허위 사실 투성이에 여기에 덧붙여서 피해자인 미 해병의 기록에 이런 사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양 근사의 죽음에 다른 특급 영웅인 황 계광의 죽음과 같은 큰 의혹을 있을 강력한 가능성이 있다.

그가 가공의 영웅이 되었다면 양 근사가 간부 출신이라서
사병 출신인 황 계광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선택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그가 국공 내전 중의 마지막 전역인 회해 전역에서 1급 영웅과 3급 영웅의 전공을 내리 수여받았던 인물이기에 사후 논공행상 삼아 선택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60년에 모 택동은 북경에서 양 근사의 전우들을
친견하고 양 근사를 추모했다..

미군의 거센 포사격에
도망쳤다가 반격도 변변히 못했던 이들이 모 택동에게 입에 발린 공치사를 받고 무어라 했을지 궁금하다.

중국이 이렇게 두 사람을 모시자 북한도 덩달아 황 계광과 양 근사 등에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고 지금도 극진히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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