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구에즈 구출 작전과 미 해병 포로 학살 사건 -제1편-









마야구에즈 구출 작전과 미 해병 포로 학살 사건 -제 1 편-


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 된 뒤에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기세를
크게 올렸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곧 공산화 되었고 북한의 김일성도
북경으로 달려가서“전쟁이 나면 잃는 것은 [휴전선의] 철조망이요, 얻는 것은 통일이다." 하고 큰소리를 치며 남한을 협박했었다.

[그런데
이 생각없는 짓이 남한이 자주국방 강화를 추진하는 계기가되어 오늘날 한국의 방위산업을 일구게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기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 루즈 정권은 이미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미국을 크게 모욕하는 도발을 해왔다.

미 상선 마야구에즈 호를 납치 한 것이다. 



                              마야구에즈 호 - 마야구에즈는 미국령 푸에르토 리코의 도시 이름이다.


미국은 구출 작전을 전개해서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을 구출해냈지만 작전 중에 헬리콥터의 추락과 전투로 다수의 미 해병들이 전사했다.

그런데 미
군의 마지막 월남전 작전인 이 작전에 한 특징이 있었다.

구출은 성공했지만 정보 부족과 졸렬한 작전으로 세 명의 미 해병들이
크메르 루즈군의 포로가 된 것인데 크메르 루즈 군은 이들 포로 중 한 명은 쏴죽이고 두 명은 때려 죽이는 잔인한 짓을 하였다.

이들의 운명이 알려진 것은 캄보디아와 미국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고 왕래가 개시 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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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2일 오후 2시경 크메르의 포우로 와이 섬 근해를 항해하던 미국 컨테이너 상선 마야구에즈 호는 크메르의 쾌속정에게 나포되었다.

마야구에즈 호는 컨테이너들을 싣고 태국의 사타힙 항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항해 수역은 모든 선박들에게 자유 항해가 보장되는 국제 수역이었지만 집권한 크메르 루즈는 이 해역이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포우로 와이 섬과 그 위의 코탕 섬


크메르 루즈 군 쾌속정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접근하자 마야구에즈호가 속도를 줄였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달아나자 크메르 루즈는 RPG 탄 한 발을 마야구에즈호의 상공으로 스쳐 발사했다.

결국 선장 찰스 밀러는 SOS를 타전한 뒤에 배를 정지시켰고
일곱 명의 크메르 루즈 병사들이 승선했는데 그들의 리더이며 대대장인 사미엔은 지도의 한 지점으로 선수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곳은 포우로 와이 섬의 동쪽이었다.

마야구에즈는 오후 4시쯤 포우로 와이에 도착했고 20 여명의
크메르 루즈가 더 승선했다.

이곳에서 크메르 루즈의 리더 사미엔은 밀러 선장에게 캄보디아의
본토에 있는 항구인 레암으로 가도록 명령했지만 밀러 선장은 배의 레이다가 고장났고 그런 상태로 계속 항해를 하면 암초에 부딪혀 침몰 할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부렸다.

사미엔은 무전으로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는지 그 자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라고 했고, 마야구에즈는 4시 55분 닻을 내리고 정박할 차비를 하였다.

마야구에즈 호의 구조 요청 신호는 여러 곳에서 수신되었으며
그중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석유 채굴 회사가 이를 접수하고 즉시 미국 대사관에 알려주었다.

워싱턴에 보고된 마야구에즈 호 납치 사건은 백악관의
아침 브리핑 때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으며, 즉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마야구에즈 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항공 정찰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워싱턴 당국은 회의 끝에 2주 전에 월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이 시국에 이런 모욕은 좌시할 수가 없으니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68년 동해에서 미 정보함 푸에블로 호가 납치되었을때
신속한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해 그 후 11개월이나 납치 상황이 지속된 것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다짐도 했다.

우선 시급한 일은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이 캄보디아 본토로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지만 미국은 캄보디아를 접수한 크메르 루즈 정권과 외교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항의조차 하기도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불러 중국에 크메르 루즈를
설득해서 마야구에즈호와 선원이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크메르 루즈 정권에 대해서는 직접 마야구에즈호의 석방을 요구하고 불응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프놈펜에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였다.

분주히 외교적 조치가 취해지는 가운데 필리핀의 큐비 갑(岬)에 있는
미 해군 기지와 태국의 우타파오 태국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한 해군 P-3 오라이온 기가 행방불명된 마야구에즈 호를 찾아 출격하였다.

 

                  P-3 오라이언(ORION) 기. 한국 해군도 보유한 해상 정찰기이다.


호주로 가던 미 항모 코랄 씨도 급거 항로를 변경해서 문제 해역으로 향하도록 명령받았다.



                                                                            항모 코랄 씨


필리핀 근해에서 항해 중이던 호위 구축함 해럴드 E. 홀트 함과 유도탄
구축함 헨리 윌슨 함도 마야구에즈 호가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실종된 마지막 위치를 향해 최고 속도로 직행했다. 

필리핀 수빅만에 있던 미 해병대에 비상이 걸린 것은
마야구에즈가 나포된 다음날인 5월 13일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포우로 와이 상공을 수색 비행 하던 P-3 오라이언 기의 탐지 레이다에
큰 해상 물체가 탐지되었고 오라이언 기는 조명탄을 투하했다. 

이에
크메르 루즈는 대공 사격으로 응수했고 연료가 다 해 가던 두 기의 오라이언 기들은 어쩔 수 없이 레이다에 탐지된 물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기지로 돌아와야 했다. 
 


                                                               호위 구축함 홀트 함


이어서 이륙한 두 기의 P-3 오라이언 기 중 한 기가 대공 사격을 무릅쓰고 포우로 와이 섬 상공에 저공으로 진입하여 마침내 아침 8시 16분에 마야구에즈 호를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오라이언 탐색기가 저공으로 마야구에즈 호의 상공을 지나 간 뒤에
크메르 루즈 대장 사메안은 밀러 선장에게 마야구에즈 호를 이동시키라고 요구했고 아침 8시 45분 마야구에즈 호는 쾌속정이 인도하는 대로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라이언 기도 마야구에즈 호가 포우로 와이를 출발한 이후 계속 뒤를 추격했다. 

마야구에즈 호의 위치가 확인 된 뒤에 미 해군 참모 총장 게이러 제독은
태국 낙혼 파놈 태국 공군 기지의 7공군 사령관 존 J 번스 중장에게 문제 해역으로 전투기를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13:00에 훈련 비행을 하다가 급파된 두 기의 F-111 전폭기가 현장에 도착하여
마야구에즈 호의 상공을 스치는 위협 비행을 수차 하였다. 


                                                                                F-111 전폭기


두 기는 비무장이었다. 위협 비행을 하던 F-111 기가 돌아가자 사메안은 밀러 선장에게 쾌속정을 따라 코탕 섬을 감돌아 들어가 해안에 닻을 내리도록 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북쪽 해안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이었다.

이어서
두 기의 F-4 팬텀들이 나타나더니 마야구에즈 호의 선수 앞 해면에 20mm 기관포탄을 퍼부었다. 위협 사격은 후속한 A-7 공격기에 의해서 계속되었고 다시 F-111 기가 추가로 나타나 선수와 선미 해면에 대한 사격을 했다.

그것은 더이상 배를 이동시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16;15에 크메르 루즈는 마야구에즈호의 선원들을 두 척의 원주민 어선에
태워 코탕 섬으로 더 가까이 이동시켰다.



                                            코 탕섬


그런데 현재 이 해역으로 달려오고 있는 코랄 씨나 홀트 그리고 윌슨함들은 5월 15일이나 도착할 예정이었고 그나마 세 척 모두 구출 작전에 투입할만한 병력은 없었다. 해병들이 승함하고 있는 행콕 함은 16일에야 도착할 예정이었고 오키나와는 5월 18일이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결국 필리핀의 제 3 상륙 사단의 79.9 기동단 중 D 중대가 마야구에즈를 구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번즈 장군은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 추가적인 병력 동원 방법을 찾았고,
동원이 결정된 것은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9 해병연대 2대대였다.

-2편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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