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크 섬에서 학살된 미국인이 남긴 비문

 

 

웨이크 섬에서 학살된 미국인이 남긴 비문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이 군인으로서 수치이지만 인간으로서도 수치라고 믿고 가르쳤다.

 

그들은 포로가 되기보다 미친 듯이 싸우다가 전멸하는 길을 택했었고 또 자신들이 잡은 포로들도 잔인하게 학대했다.

 

피아 모두 포로는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에서였는데, 일본군은 기분이 내키면 포로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리고 그 포로 학살의 잔인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학살의 많은 경우에 군도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중 군도로 목을 쳐서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당한 연합국 포로들이 30여 명이 넘는다는 조사도 있었다.

 

 

웨이크 섬

 

 

그런데 태평양 전쟁 중 남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군인 포로가 아닌 민간인 포로가 일본군에 의해 참수 당한 사건이 있었다.

   

남태평양의 웨이크 섬은 전쟁 전 아시아와 미국을 오가는 대형 비행정의 중간 기착지로 유명해진 섬인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미군은 이 섬이 일본군의 목표가 될 것이라 예측하고 이곳에 급히 해병대와 해병 항공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 섬을 요새화하기 위해 미군과 계약을 체결한 민간 토목 회사의 기술자 1,200여명도 함께 이 섬에 들어왔다.

 

 

웨이크 섬의 해병 항공대 F4F 와일드 캣

 

 

 

아니나 다를까 진주만 기습과 동시에 일본 해군이 1941년 12월 8일 이 섬의 점령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용맹히 저항하였고, 일본군은 웨이크 섬 주둔의 소규모 해병 항공대에게 구축함 기사라기가 격침되었고 해안포에 의해 다른 구축함 하야테도 격침되었다. 상륙을 시도하던 상륙정도 파괴되고 다수의 일본군이 사망하였다.

 

 

 

웨이크 섬 해변에서 파괴 된 일본군 초계정

 

 

이에 놀란 일본 해군은 12월 23일 진주만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던 기동부대의 항모 히류와 소류, 두 척을 파견하고 훨씬 우수한 병력으로 공격하고나서야 이 섬을 점령할 수 있었다.

 

웨이크 섬의 방어 사령관 커닝햄 중령과 군인들 그리고 상당수의 민간인들은 일본 본토와 일본이 점령한 중국 등지로 이동되었지만 100여명의 민간 건설회사 직원들은 섬에 남아서 강제 노동을 강요받았고, 일본은 이들 미국인 전문가들을 이용해서 섬의 요새화 공사를 계속했다.

 

1943년 미 해군의 잠수함대가 섬을 봉쇄하고 공습이 잦아지자, 웨이크 섬에 대한 미군의 상륙 작전이 임박한 것으로 잘못 판단한 일본군 방어 사령관 사카이바라 대좌는 이들 미국 민간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경우 이들의 존재가 일본 군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 함재기들에 의한 웨이크 섬 공습.

이 대규모 공습 이틀 뒤 민간인 포로의 대학살이 있었다.

 

 

1943년 10월 5일 밤. 2년간 죽을 고생을 하며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98명의 억류 미국 민간인 포로들은 북쪽 해변으로 끌려가서 눈 가리개를 하고 기관총구 앞에 세워졌고, 이어서 기관총의 총구에서 실탄이 줄기를 이어서 터져 나와 이들을 쓰러뜨렸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일대를 흔들다가 점점 조용해지고 가냘픈 비명소리가 여기 저기서 뒤따랐지만 일본군은 총검으로 그들을 잠재워 조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학살 민간인 중 한 명이 이 기관총 사격의 광란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 도주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섬을 수색해서 그 민간인을 체포했고, 사령관 사카이바라 대좌는 격노해서 일본도를 뽑아 직접 그 포로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 [사카이바라는 다음해인 1944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웨이크 섬에 정박한 함정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사카이바라 소장.

앉은 사람 중에 왼쪽에서 세번째다.

 

 

전쟁이 끝나고 섬에 있던 일본군은 1945년 9월 4일 진주한 미 해병대에 항복했다. 당연히 미군은 억류 미군 포로들과 민간인들의 행방을 찾았고 학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학살에 관여한 사카이바라와 참모장 다치바나 등은 모두 전범으로 구속되었고 괌에서 열린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카이바라는 형이 집행되었고 다치바나는 나중에 종신형으로 변경되었다.]

 

현장에서 총살을 집행했었던 일본군 장교들 중 일부는 전범으로 사형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책임은 사카이바라에게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런데 학살 현장을 조사했던 미군 조사단은 학살한 시체들을 되는대로 묻어 버린 집단 매장지 해변에서 글이 새겨진 산호초 바위를 발견했다.

 

조사 결과, 이 미스테리의 글은 기관총 학살에서 살아남은 민간인이 도피 중에 다시 돌아와 억울하게 죽은 사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이 학살의 현장을 확실히 기록하여 후일의 조사에 증언을 하기 위해서 조각해 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명의 민간인 포로가 남긴 추모비.

98명의 미국 포로가 43년 5월 10일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여기에 써있다.

 

 

그러나 민간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가 증언을 새긴 바위를 남기고 사카이바라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신원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이 웨이크 섬의 민간인 학살은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들이 미국 민간인들에게 가한 최대의 학살 사건이며 장군[제독]이 직접 칼을 휘둘러 학살을 자행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비극적인 웨이크 섬의 학살 현장은 1944년 발지 전투에서 있었던 말메디 숲속의 포로 학살 장소와 같이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모하는 유명 방문지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일본군은 웨이크 섬을 점령하고서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불도저'를 처음으로 보았다. 아직도 삽과 괭이에 의지해서 비행장을 만들던 수준의 일본군 공병들은 불도저의 성능과 그 발상에 경악했다.(사실 일본도 불도저를 충분히 만들 능력이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불도저에게 '인간 천 명의 몫을 한다'고 해서 센진리키[千人力]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최대로 활용하였다.

 

민간인인 불도저 기사도 불도저와 함께 억류되어 있다가 학살 되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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