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비극 -어머니 가슴에 묻힌 아들들

 

 

 

 

 

6.25의 비극 -어머니 가슴에 묻힌 아들들

 

 

 

글을 쓰는 오늘은 현충일이다.

 

세월이 흘러 주변에 전몰자 유가족 되시는 분들도 많이 돌아 가시고 옛날에 비해 추모의 분위기가 어쩐지 옅어진 것 같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호국 영현들의 공로는 잊혀 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호칭을 선사한 마가렛 히긴스 여기자가 촬영한 사진.(라이프지 한국 전투 경찰 특집중에서). 공비의 매복에 전사한 박 원기가 관에 담긴 주검으로 돌아오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목 메어 울고 있다.

 

 

전쟁의 비참함은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고 사라진 군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 주는 충격과 슬픔에서도 시리게 느껴진다.

   

특히 자식들은 잃은 전사자의 부모, 그 중에 어머니의 슬픔이란 필설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울고 또 울고.. 하늘이 무너지는 어머니의 심정이 너무도 절절히 배어 나오는 장례식 사진이다. 

 

6.25전쟁에서 사라진 젊은이들은 대개 1930년 전후에 태어난 젊은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제하의 수탈 시대를 겪으며 빈곤의 늪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로, 영아 사망률도 무척 높아서 자식을 온전하게 길러내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열달간 몸속에 품었다가 산고의 아픔을 겪고 얻은 아들이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산부인과나 소아과의 도움은 상상도 못했었고 우유는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어머니들은 노심초사하며 아들들을 정성스럽게 키웠고, 그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잘 자라준 것에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이다.

 

 

관에 담겨 귀향한 박원기

아들을 집에 들이지도 못하고 길에서 맞아야 하는 어머니의 넋놓은 슬픈 통곡

 

 

그런데 북의 김일성이 민족상쟁의 침략을 개시하면서, 그 어렵게 키운 아들들이 면사무소에서 보낸 소집 영장에 의해서 전세 위급한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 없이 정한수 한 그릇을 떠놓고 아들의 무사함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체부가 던지고 간 아들의 전사 통지서 하나로 어머니들은 천지가 암흑으로 변하는 고통 속에 던져진다.

 

 

민족 전체가 김 일성이라는 한 못 된 인간의 불장난으로 심한 고통 속에 몰렸을 때 한 가정의 모자에게 다가 온 불행한 사연 하나를 소개해본다.

 

나에게 친척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장교로서 6.25전쟁에 참전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어느 날, 그 장교분은 나의 부모님들에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수류탄에 부상하여 군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목격했었던 일화를 들려 주었었다.

 

 

파월장병 환송식에서 - 유명한 사진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짓는 듯한 태연한 표정과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애간장 녹는 표정이 대조적이다.

 

 

철없는 나이에 옆에서 들은 어른들 대화이지만 어찌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지금까지도 머릿 속에 그 기억이 선명하다.

 

일선에 한 초급 지휘관이 있었는데 그는 아마도 폭발물 처리를 담당하던 병기 부대 소속이었던 것 같다. (워낙 어린 나이에 들은 이야기라 그런 자세한 내용을 물어 보지는 못했다.)

 

불발탄 제거 작업이 있었는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병들이 꺼리자 그가 직접 나섰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불발탄 해체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폭탄이 대인 지뢰였는지, 수류탄이었는지, 아니면 박격포탄이었는지도 확인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해체 작업중 폭탄이 그대로 터지면서 그 장교는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고, 폭연과 먼지가 가라앉은 뒤 놀란 부하들이 달려 가보자 장교는 팔다리가 날아가고 얼굴은 화상을 입어 엉망이 되었지만 겨우 숨은 쉬고 있었다.

 

그는 야전 병원으로 급송되었는데 응급조치 후에 확인한 그의 상태는 끔찍한 것이었다.

 

팔 다리가 달아나고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졌는데 두 눈과 두 고막이 크게 손상을 입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단지 입은 입술이 크게 일그러졌지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얼굴에서 후각 기능과 함께 살아남은 유일한 기능이었다.

 

그래도 그는 겨우 숨을 쉬면서 가냘픈 명을 이어갔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급보를 받은 그의 어머니가 병원에 달려왔다. 어머니는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없이 처참하게 변한 아들을 부여안고 봇물같은 통곡을 터뜨렸다.

 

“ 에미다 ! 나다! 얘야, 대답해봐!”

 

그러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아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했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갑자기 가슴을 풀어 헤치고 아들의 입에 젖을 물렸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바로 어루만지며 매일 빨던 엄마만의 가슴이었다.

 

붕대로 칭칭 감겨진 아들의 얼굴에서 제대로 기능을 하던 입이 열렸다.

 

가냘픈 목소리였다.

 

“ 엄마 !--- 엄마 !”

 

그리고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흘러 나오며 두 손이 달아난 짧은 두 팔로 엄마를 안아 보는 시늉을 했다. 마치 아기 때 엄마 품에 파고 드는 것과 같았다.

 

아들의 두 눈에 감긴 붕대에도 눈물이 배어 나왔다. 겨우 모자임을 확인한 두 사람은 부여 안고 한없이 통곡을 했지만 군의관의 제지로 곧 떨어져야 했다.

 

두 모자의 눈물겨운 상봉을 지켜보던 군의관과 간호 장교, 그리고 같은 중환자들은 모두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 뒤 아들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발인 - 아들 박윈기는 어머니의 가슴에 묻어 두고 육신 박원기는 산으로 떠난다. 

마가렛 히긴스 여사가 유해 도착부터 발인까지 며칠간 밀착 취재 촬영한듯하다.

 

 

세월이 지난 후, 그러니까 내가 좀더 성장한 후에 나는 자식의 희생에 자식을 안아 기른 엄마의 슬픔이 누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었다.

 

내 고향에서의 일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한 집안의 아들이 팔자를 펴보겠다고 월남전에 지원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귀국 두어 달 전에 작전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말았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전사 보상금으로 역 근처에 작은 집을 사 이를 개조해서 여인숙을 차리고 월남 여인숙이라 이름 지었다.

 

아들의 전사로 생계는 괜찮게 되었지만 두 부부는 아들을 잊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동네 입구 공원 비슷한 곳의 한 벤치에 앉아있던 월남 여인숙의 두 부부를 보았다.

 

남편이 눈물을 훔치는 부인에게 뭐라고 나무라는 듯이 달래면서 한참 뒤에 데리고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마침 나는 그 앞 구멍가게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구멍가게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쯧쯧,, 아직도 새끼를 못 잊어서 저러고 있구먼! 지난 추석 때도 저러더니..“

 

 

이역의 전장에서 아들을 떠나 보내고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머리는 백발이 되었지만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의 슬픔은 변함이 없다.

 

 

그 때는 아들이 전사하고 세월이 6-7년 정도 흐른 뒤였다. 고통을 잊을만한 세월인데 어머니는 그렇지가 못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 말이 생각나는 추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의 가슴으로 엄마를 확인했던 아들도 가슴 속에  한없이 포근한  엄마의  가슴을 담고 저 세상으로 갔을 것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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