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이 전한 또 하나의 이야기 -한국 참전 영국군의 가장 감동적인 사진-

 

 

 

 

 

 

 

한국 참전 영국군의 가장 감동적인 사진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을 방문해 참배한 런던올림픽 선수단

 

영국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이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을 방문해 한국 참전 용사들을 참배하였다고 한다. 한국전 중 참전 영국군은 미군다음으로 많은 육해공군을 파견하여 사상자도 미군 다음으로 많이 배출했다. 해군의 역할 또한 아주 커서 항공모함까지 파견하는 등 바다에서 큰 영향을 차지하였다.

 

홀로 한국민들이 이를 알아주는 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금메달리스트들을 포함한 선수단의 참배는 아주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한국 참전 영국군에 관한 인상 깊은 사실을 올려본다.

 

 

해피 밸리 추모비의 헌정식 . 라이안 신부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존 몰 중위

 

사진 속의 주인공은 아직 생존해 있다. 위의 사진은 한국전 중 영국군이 남긴 사진 중 최고로 감동적인 사진으로 판단된다. 사진은 전투에서 먼저 떠난 전우들의 영령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이사람은 영국군 얼스터 대대의 존 몰 중위다 . 그리고 그의 옆에서 의식을 주제하는 사람은 라이언 신부다.

 

해피 밸리 영국군 묘소에 세운 추모비 우마차가 다니는 앞 구불구불한 길은 현재도 남아있다. 이 길을 따라 대 살육이 있었다.

 

장소는 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메네미 고개 산기슭에 마련된 영국군 157위의 묘지다. 때는 1951년으로 무릎을 꿇고 경건한 기도를 하는 존 몰 중위는 현재도 생존해있다. 그는 그해 초인 1951년 1월 새벽 서울 시민의 1.4 후퇴 작전을 완료하고 철수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157명의 전사자와 20명의 포로가 발생한 해피 밸리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피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만큼 먼저 간 전우들에게 미안하고 애통한 마음에 간절한 마음을 기도에 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이 있게된 해피 밸리 전투는 일부 책자에 고양 전투라고 명칭만 소개되어 있는데, 실제로 전투는 고양시와 양주시시 접경에서 발생하여 전투장의 80% 정도가 양주시시이므로 고양 전투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는 생각에 영국군이 부르는 대로 해피 밸리 전투라고 하겠다.

   

1.4 후퇴를 엄호하다가 철수하던 영국군이 어이없이 당한 이 전투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자, 영국군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다. 1950년 12월 말 영국 얼스터 대대는 현재 은평 789단지의 북쪽 6킬로에 있는 쟁고개에서 남진해오는 중공군을 막고 지연작전을 명받아 긴급 투입되었다. 대대는 대대장 그루톤 중령이 병이 들어 일본으로 후송을 갔기 때문에, 부대대장 블레이크 소령이 지휘를 맡았다.

 

 

오른쪽 뒤에 비운의 블레이크 소령이 서있다.오른쪽 뒤에 비운의 블레이크 소령이 서있다. 그는 현재 부산 유엔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추운 고지에서 연말 연시를 보낸 얼스터 대대에게 중공군이 공격해온것은 1월 2일이었다. 영국군은 이를 미 공군기의 지원을 받아 격퇴하였다. 영국 전사에는 이 전투를 '채근현 전투'라고 부르는데 현지에 가서 여러 어르신들께 물어본 즉 그런 지명은 없다고 한다. (이곳의 현지명은 쟁고개다. 작은 고개의 방언으로 후방에 메네미 고개라는 큰 고개가 있다)

 

1월 3일 오후 늦게 대대는 철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스터 부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철수를 아주 천천히 추진했다. 최전방에서 방어하다가 최초 철수부대가 된 B중대가 철수 완료를 대대 본부에 보고한 것이 22:00이었다. 접적 이탈은 신속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매우 느린 철수였다. 선두 B중대가 산(195 고지)에서 내려와 철수할 때, 정확히 말하면 차량으로 된 철수부대가 메네미 고개에 진입하기 직전 어두운 하늘에 나타난 미 공군 C-47 수송기가 조명탄 한 발을 투하하였다.

 

 

 

이 조명탄은 얼스터 부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중공군은 이 조명탄을 신호로 즉시 기습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철수하는 영국군 좌측 즉, 서쪽의 빈틈으로 기습 부대를 침투시켰다. 이 곳은 미군 25사단이 방어하던 곳이었는데 이들은 철수 명령을 받자 인근 얼스터 부대에도 알려주지 않고 일찌감치 철수해버려서 이곳은 텅텅 비어있었다. (현재 고양시의 불미지리 뒷산이었다.)

 

해피 밸리 현재의 곡릉천 -천변을 논밭이 잠식해서 많이 좁아졌다.

 

영국의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중공군은 이 곳을 통해서 철수로 3km 후방에 있는 메네미 고개까지 점령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상황을 이용해 중공군이 작전을 추진한 것을 보면, 추측하건데 현지 거주 부역자가 있었던 듯하다. 마지막 철수 부대인 전차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한 시간은 12시경이었다. 철수 부대의 선두는 미군 트럭을 타고 이미 전장에서 멀리 이탈한 뒤였다.

 

철수부대의 후미 부대와 메네미 고개 좁은 길로 접어들던 선두 부대는 동시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중공군이  조명탄 투하로 영국군의 노출된지 두시간만의 기습이었다. 고양시와 양주시시의 접경인 곡릉천 주변에서 기습을 받은

영국군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투는 새벽까지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부대장 브레이크 소령을 비롯한 157명이 전사했고, 후사르 두 개 중대에서 지원 나온 14량의 전차도 모두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로 전차 중대장 쿠퍼 대위와 다수의 전차병들 역시 전사했다. 이때 157명이 죽고 20여명이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 중 단 70명만이 쇼우 소령 지휘하에 서쪽으로 우회하여 겨우 탈출했을 뿐이었다.

 

 

철수하던 영국군이 최초로 공격 받은 곡릉철교 - 아직도 교각과 침목에 총탄 자국이 나있다.

 

밤새 주민들은 총소리에 벌벌 떨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마을 골목과 주변 논, 밭 그리고 개울에는 전사한 영국군의 시체로 가득했다. 엔진의 시동이 아직 꺼지지 않아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차도 있었다. 중공군은 영국군의 무기는 물론 자켓과 바지 모두를 약탈하고 시체는 그냥 팽개쳐 놓았다. 주민들은 시체를 거두어 여기저기에 모두 묻어주었다. 두 달 뒤인 3월이 되자 영국군이 돌아와 유해를 모아 메내미 고개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재편한 대대의 신임 대대장 카슨 중령은 근처 석물(石物) 공장앞을 지나가다가 붉은 색채가 나는 화강암을 발견하고 묘비를 제작하여 이를 영국군 묘지에 세웠다. 위의 사진은 한국 석공이 만든 영국군 추모비의 헌납식이다. 영국군의 유해는 그곳 양주군 삼하리에 1950년대 중반까지 잠들어 있다가 부산 유엔군 묘원으로 이장했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묘비는 1962년도 영국 해군 순양함 벨파스트에 의해서 얼스터 연대의 고향인 북아이랜드의 벨파스트로 이전되어 현재는 그곳 시청에 있다.

   

영국군이 명명한 이 전투의 이름 "해피 밸리"는 1918년 프랑스 알라스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의 묘지에 붙여진 해피 밸리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나는 작년에 파주군 설마리 그로스터 연대 행사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바로 최초 철수 부대였던 B중대 중대장 로빈 찰리 대령을 만나 그를 해피 밸리 전투장으로 안내하였다.

 

당시 B중대장 로빈 찰리 대령- 최초의 철수 부대라서 비극을 피했다 . 존 몰중위는 B중대 소대장이었다.

 

그 인연은 올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 얼스터 연대 재향 군인회 캐롤 워커 여사를 다시 안내하게 하였다.  그날은 비바람이 무척거셌다. 그렇게 고생하며 찾아간 곳은 소년시절의 어느 겨울밤 영국군과 중공군의 전투를 밤새 가슴 조리며 지켜보았다던 동네 어르신댁이었다. 

 

그 분은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그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영국군을 매장하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신록이 돋을 때 여기저기 매장한 영국군들의 묘지에서만 푸르디 푸른 풀들이 솟아나 무성하게 자라더라는 말을 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캐롤 여사는 눈망울을 흥건히 적시며 울먹였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워진 나는 위의 존 몰 중위의 사진이 생각나서 그 분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존 몰 중위는 소령으로 예편해서 현재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생존해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존 몰씨의 현재 모습

 

캐롤여사는 그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자주 연락을 주고받은 사이라고 했다. 몰씨는  고향인 북 아일랜드를 떠나 현재영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그 분은 로빈 찰리 대령의 B중대에서 소대장을 했었다. 중공군이 기습전 부대 1차로 계곡을 빠져 나간 덕에 그는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분의 한마디라고 듣고자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해피 밸리 전투와 관련되어 내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있다. 1951년 1월 4일 새벽 서울 북방 곡릉천변에서 전사한 얼스터 부대의 장병들의 절반이 고향이 영국이 아닌 아일랜드라는 사실이다. 아일랜드 대사관은 내년 한국과 수교 30년 기념으로 기념 조형물 사업을 구상중에 있다고 한다. 한국민을 위해서 가장 헌신적인 봉사를 한 아일랜드의 인물을 기리는 사업이다.

   

아일랜드인으로 한국에 헌신한 대표적인 분으로 제주도 이시돌 농장의 패트릭 제임스 맥크린치 신부가 있다. 한국이 세계 밑바닥의 가난함에 시달리던 1953년 제주도에 와서 농민들의 삶의 개선과 자립을 돕고자 이시돌 농장을 열고 제주도민의 소득 증대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였다. 그리고 6.25 사변 때 삼척과 목포 등지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구금되어 죽음을 맞은 7명의 콜룸방 수도회 소속 아일랜드 신부들도 있다. 

 

그러나 맥키 아일랜드 대사는 많은 인물들 중 해피 밸리 전투장을 방문해서 둘러보고난 뒤,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는기념 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년에는  비가 건립될 예정인데 좋은 결말을 맺고 그 기념비의 제막식에 가장 감동적인 사진의 주인공인 존 몰 증위도 참석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Trackbacks 0 / Comments 0

댓글 남기기

블로그 인기 키워드

Tistory Cumulus Flash tag cloud by requires Flash Player 9 or better.

링크

re_footerlink.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