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1-

 

 

 

 

 

 

 

抗蒙戰爭 비화

 

 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1편-

 

 

 

 

어지간한 국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알라모 요새를 아시리라 믿는다. 텍사스 주에 있는 한 호국 유적지로써 미국 국민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1836년 텍사스는멕시코 영토였다 . 이곳으로 이주해 간 미국인들은 멕시코 군대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아라모 요새 - 원래는 교회였었다.

 

알라모는 2,400명의 병력으로 공격한 멕시코 군에게 200여명의 미국인들이 13일간 끝까지 저항하다가 두 명의 여성을 제외한 전원이 모두 전멸한 요새다. 멕시코 군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알라모의 미국 용사들 중에는 데이빗 크로켓이나 데이비드 보위 등 서부 개척사에서 거의 전설화 된 인물들도 있어 이 명소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다.

   

알라모 요새 전투는 여러 번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TV에도 소개되었으며 관련된 글이나 책도 무척 많다. 미국민들이 알라모 요새의 희생 선열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가보자. 마사다 요새라는 곳이 있다. 외길로 연결된 절벽 위의 평평한 곳이다. 로마 식민지 지배에 항거의 깃발을 든 이스라엘 민족의 열심당 독립 운동가들이 AD73에서 AD74년까지 2년간 농성을 하다가 로마 공성군에게 요새가 점령당하게 되자 여자 2명과 어린 아이 5명만 남고 960명이 자결을 했던 영웅적 독립 운동의 상징적 장소다.

 

마사다 요새 - 성은 산 꼭대기에 있었다.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군인에게는 이곳이 성지와 같아 군장병들이 단체로 자주 방문하여 독립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자결로 마감한 선조들을 기리는 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이 곳 역시 세계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호국 유적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군민이 나라를 지키다가 압도적인 적에게 전멸의 비운을 겪고 사라진 슬픈 유적지가 여러 곳 있다. 주로 임진왜란 때 발생한 비극의 현장으로써 부산의 동래성이나 진주성 그리고 남원성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 호국 순명의 유적지로써 가장 근세의 것은 1871년 신미양요때 어재연이 목숨을 던져서 방어했던 강화도의 광성보가 있다.

   

그러나 적군의 공격에 버티다 한계에 다달았을때 그냥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성 밖의 적군에게 최후의 돌격을 하여 전원 옥쇄한 전투의 현장이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춘천시 봉의산에 있다.

 

복원한 봉의산성복원한 봉의산성

 

이들이 죽음에 몸을 맡긴체 부딪혀 싸운 적은 아마도 한민족 5천년사중에 침공해온 군대 중 최고일지도 모를 몽골 군대였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고 본다. 몽골이 역사에 최초로 나타난 시기는 한국의 통일 신라 시대였던 9세기 경이였는데 당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고 미워하는 그렇고 그런 중국 북쪽의 유목 민족이었다.

 

국가도 이루지 못한 북방의 미개 민족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징기스칸이 나타나자 사태는 돌변하였다. 그는 군사력과 외교력으로 부족들을 통일하고 주변 강대국들을 공격하며 정복해나갔다.

 

징기스칸의 기병대-페르시아 세밀화징기스칸의 기병대-페르시아 세밀화

 

전원 기병들로 구성된 몽골군은 천하무적이었다. 이들의 질풍같은 진격에 서역의 여러 나라는 물론 페르시아와 러시아도 굴복하고 말았다. 몽골군의 발자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너머 유럽의 폴란드와 헝가리에 까지 미쳤다. 이들 몽골 기병대가 질풍같이 밀려와 기관총 사격과 같은 화살의 비를 연달아 퍼부으면 그 어느누구도 감히 나가떨어지지 않는 군대는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맨 동쪽 한반도의 구석에 위치한 소국 고려만은 예외였다.

 

몽골 전성시의 영토 지도  침공 정복로도 보인다.몽골 전성시의 영토 지도 침공 정복로도 보인다.

 

 

당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었고, 최 씨 집안의 무인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무인 정권의 실력자 최우는 몽골에 굴종하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와도 연결되었기에 끝까지 저항하기로 하였다. 몽고는 1231년 최초로 고려에 침공하여 항몽전쟁의 전단을 열었다.

 

항몽전쟁은 1231년(고종 18년) 제1차 침입을 시작으로 총 6차례나 이어졌다. 몽골과의 전쟁 간 무인 정권의 최우가 최후까지 항전을 다짐하며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는 등 근 30여년간 피흘리는 기나긴 전투가 벌어졌었다.

 

몽골은 이 작은 나라가 속을 썩이는 것을 놔둘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은 무릎 꿇렸던 거침없던 몽고군이었는데 정작 이 작은 나라 하나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건 용납되지 않았다. 몽골은 그들의 무적 기병군단을 이끌고 고려를 30년 동안 여섯 번이나 침공했지만 번번히 고려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들은 국토를 유린하는 정략으로 먼 남쪽의 경주까지 침공해 황룡사 9층탑을 불태우기도 하였지만, 고려의 저항은 극심했다. 몽골이 고려같은 작은 나라 하나를 말살하겠다고 일곱 번이나 시도한 예는 없었다. 고려 군민의 대몽황쟁은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공격전에는 별로였지만 방어전투에서만큼은 최강이라는 외국 학자들의 평가를 십분 확인해 준 전투였다. 적어도 아세아 대륙을 휩쓴 몽골군에게 이토록 격렬히 저항하며 무력 점령당하지 않은 최초의 국가는 고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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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있지만 여몽 연합군은 일본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신풍(神風)이라는 태풍에 의해서 섬멸된 것이다.  몽골은 월남도 세 번에 걸쳐 침공했다가 패배하기도 하였었지만 그 저항의 규모는 월남 북부에 한정 되었었고 전투의 규모도

훨씬 작았다. 월남의 저항은 앞서 있었던 고려의 항쟁이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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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저항은 끈질기고 거셌다.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의 기마 전략에 고려군민이 구사한 전략은 고구려때부터 한민족이 개발해온 산성 전략이었다. 외적이 침공해오면 군민 모두 식량과 필요 물품을 챙겨 들고, 주변 산꼭대기에 구축해놓은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했다. 그런 곳들은 몽골의 기병대가 어떻게 해볼 수가 있는 지형이 아니었다.

 

몽골군이 유라시아 각국의 평지(平地)에 있는 성을 공격해서 정복한 기록은 많다. 하지만 고려의 산성은 고슴도치 같아서 천하무적의 몽골군도 쓴잔을 마시고 물러나야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최초 1차 몽골 침공 때 박서와 김경손이 방어했었던 귀주성 전투였다.

 

고려 북방지도 몽골군 침공시 보다 훨씬 전에 있던 요나라의 침공시 지도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된 귀주성 전투는 민족 외적 격퇴사에서 방어 전투의 전설과도 같은 승리였다. 일만여명의 몽골군의 다섯 번이나 되는 공격을 박서와 김경손이 지휘하는 오천의 군민이 기막힌 전투 정신을 발휘하며 막아냈다.이 전투를 지휘했던 몽골의 살레타이는 2차 침공 때도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에 들어왔다가 처인성에서 고려군민에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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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의 극함을 다했던 귀주성 전투에서 고려군민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가하는 사실을 아래 일화로서 소개한다. - 전투가 한창일 때 몽고측에서 70이 다된 노장 한 명이 성밑까지 접근하여 고려군의 배치 상황과 병기및 장비들을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다.

 

“내 소년 시절로부터 수없이 많은 전투에 종군하였지만, 이처럼 아군의 맹공을 받고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본적이 없었다. 이 성안의 장수들은 반드시 훗날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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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대몽항쟁에서 고려는 여러 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성뿐만 아니라 서경성,죽주성, 충주성, 자모산성, 상주성등 여러 성들에서 고려는 승리를 거두었다.

 

죽주성 - 이곳에서도 몽골군을 물리쳤다. 죽주성 - 이곳에서도 고려 군민은 몽골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려가 매번 성의 공방전에서 승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몽골이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협박에 함신진 방수장군 조숙창과 부사 전한처럼 손을 들고 항복한 최초 공격지 함신진 같은 성도 있었다. 1 차 침공 때부터 민족 배신자가 출현했었다. 자사 홍대선은 부하 1,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몽골군에게 항복한 뒤 대를 이어가며 부역했다.

 

아들 홍복원도 몽골의 주구가 되어 고려 침공에 앞장섰다. 손자 홍다구가 몽골의 앞잡이로서 활약이 제일 뛰어나 항몽 투쟁을 하던 삼별초를 제주도까지 추격해서 멸망시켰다. (계속)

 

 

Trackbacks 0 / Comments 3

  • pmc8866 2014.10.29 16:32

    해박한 지식에 바탕한 좋은 글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외국역사는 잘 알아도 자신의 역사는 모르지요,
    역사에 나름 관심이 있다는 저도 표제의 산성 전투는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2015.02.19 21:05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mnd9090.tistory.com 국방부 블로그 2015.02.22 15:52 신고

      네. 안녕하세요. 저는 동고동락 지기입니다. 말씀하신 글은 저희 동고동락 울프독 작가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글의 출처를 저희 동고동락으로 밝혀주신다면 운영하시는 까페에 스크랩하셔도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국방부 대표 블로그 '동고동락'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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