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2-

 

 

 

 

 

 

 

 

抗蒙戰爭 비화

 

 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2편-

 

 

 

사납고 잔인하기가 손 꼽히는 몽골군의 공격에 여러 성들이 점령당하고, 성안의 사람들은 몰살당했다. 몽골 군대의 성 공략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몽골  군대는 공격전에 항복한 군대는 그대로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고 저항하다가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면 가차없이 학살해버렸다.

 

이 가혹한 지시는 징기스칸이 직접 내린 것이었다. 그가 내린 명령은 절대적으로 냉정했다. “항복하면 죽이지 말고 항복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베어 버려라. 열 손가락에 상처를 입힌다해도 한 손가락 자르는 것만 못하다."

  

소수의 작은 몽골의 군대로는 광대한 점령지를 전부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한 징기스칸은 학살로 공포심을 조성해 피정복 민족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몽골 군대가 가는 곳은 항상 피바다의 학살이 뒤따랐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고려도 그런 피바다의 쓴 맛을 보아야 했다

   

일차 침공 때의 철주성 전투는 역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철주 군민들은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성문이 뚫리자 전투 지휘관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성내의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관아 후면의 창고에 불러 모은 다음, 불을 지르고 성내에 질주해 들어온 몽골 기병 부대와 장렬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몽골이 자행한 집단 학살을 겪은 비운의 성들에는 평주성도 있었고, 여기서 소개하는 춘주성도 있었으며, 그 중에는 최대의 피해로 남은 황해도 양산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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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성 전투는 여기에 특별히 소개한다. 30년 항몽전쟁에서 최대의 학살이 진행된 곳이기 때문이다. 8월12일 황해도 양산성이 운제를 타고 성벽을 넘은 몽골군이 불화살을 성내에 마구 쏘아 대 화재를 일으키고 성내로 쇄도했다. 성 방호별감 권세후는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고 남은 병사와 주민 4,700명이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멸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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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고려를 침공해 몽골 사령관이 죽임을 당한 전투도 있었다. 처인성 전투에서 벌어졌는데, 이 처인성은 둘레가 단지 425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시골 공설 운동장 크기의 성이었다. 이곳에는 군창이 있었다. 전쟁 이전에는 부곡(部曲) 천민들이 모여 살았었다. 이곳의 지휘관은 정식 군인이 아닌 승장(僧將) 김윤후였다. 그는 지휘를 맡자 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성 밖 300미터 지점 언덕에 (현재는 살장터로 불림)에 수 십명의 저격수를 배치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적장 살레타이는 단지 5,6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지형 정찰에 나섰다.

 

 축구장만한 처인성

 

눈으로도 대충 어림잡을 수 있을만큼 처인성은 위와 같이 둘레가 425여 미터의 작은 성이다. 살레타이는 불과 수명의 수하병들을 이끌고 성밖을 정찰나왔다가 승장 김윤후가 배치한 궁수들에게 저격당해 죽고 목이 잘리고 말았다. 하지만 위의 사진과 달리 실제 묘사된 처인성 전투는 아래의 그림처럼 주변이 산세가 무척 험하여 마치 만리장성에서 전투를 하는 것 같다.

 

김윤후로 짐작되는 대장이 가사를 입고  살레타이를 조준하고 있는데 실상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박물관의 민족 전쟁화들을 보면 이런 엉터리 그림들이 수두룩하다. 이 그림도 화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당시의 이야기를 보다 정확하게 담을 수 있는 전투화로 남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고려의 성이 남긴 이야기들은 후손인 우리가 볼 때 아주 애절하다. 이야기를 그런 비운의 성 중에 하나인 봉의산성으로 옮겨보자.

 

일본을 침공한 몽골군들, 개인기의 전투를 시도하는 가마쿠라 막부 무사들에게 몽골의 집단 궁병의 집중사격을 가해 패퇴시켰다.

 

봉의산은 해발 301미터로서 지금은 춘천 중심부의 일부가 되어 가고있는 소양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강이 물류(物流)의 줄기로 활용하던 과거에는 북한강와 소양강이 만나는 이 춘천의 강에 위치한 산성은 예로부터 전략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주목받아왔다.  

 

강변에 외딴 산 하나가 우뚝 솟은 지리적 특성이 한강 하류에 있는 행주산성과 흡사한 점이 있다. 봉의산성은 춘주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서에 나온다. 다른 한국의 산성처럼 산정(山頂) 즉, 7부 능선을 따라 산성이 구축되어 있다. 봉의산성은 경사가 70도가 넘는 급경사지를 활용해서 성벽을 필요한 곳에만 드문드문 쌓은 것이 특징이다.

   

국방의 요충지인 봉의산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 1216년 거란족이 침공했을 때 나타난다. 거란족들은 1216년경 몽고군에게 쫓기자 고려 영내로 도망쳐오게 되었다. 이들은 개경을 함락하기도 했지만, 주로 강원도 일대를 노략질했었다. 춘주, 즉 춘천도 공격당했던 곳 중에 하나였다.

 

춘천의 주민들은 봉의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안찰사 노주한(盧周翰) 이하 많은 관속들이 살해되었다. 이 최초의 봉의산성 전투는 너무 기록이 짧아서 그 전모를 잘 알 수 없었지만 관속이 살해되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나중에 침공한 몽골족처럼 군(軍)과 민(民) 가리지 않고 모두 몰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방어 전투중에 참가한 많은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으리라. 몽골 침공 때의 춘주성, 즉 봉의산성 전투는 고려사절요 고종 40년 9월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봉의산성이 운명의 최후를 맞게 된 것은 고종 40년(1253년) 음력 8월에 몽골군 사령관 예꾸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한 4차 침공 때였다. 춘주성이 도륙당한 것은 바로 9월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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