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완-

 

 

 

 

 

 

 

 

抗蒙戰爭 비화

 

 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완-

 

 

침공 몽골군이 춘주 쪽으로 몰려오자 교주 안찰사(按察使) 박천기와 문학(文學) 조효립은 주변 주민을 춘주성[봉의산성]에 집결하여 방어 준비를 하였다.

 

 

춘천대첩 애국 선양회장 황한석씨가 성벽을 소개하고 있다. 황회장은 농사꾼이라고 자기를 소개해 참 겸손한 분이구나 했는데 정말 성실하게 농사를 짓는 분이었다. 이런 보통사람들이 모여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설립한 춘천 대첩 애국 선양회는 춘천을 호국의 도시로써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의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고 있는데 관의 재정적 지원이 없어서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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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성을 공격한 몽골군은 투항을 권했지만, 돌아오는건 결연한 고려군의 거절 통보뿐이었다. 몽골군은 여러 번의 고려 침공에서 고려 군민의 성외(城外) 기습 출격에 항상 골탕을 먹은 탓에 이번에는 교활한 작전을 쓰기로 했다. 

 

6,25 무렵의 춘천 봉의산6,25 무렵의 춘천 봉의산

 

성 주변에서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봉의산성 주변에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두르고, 그것도 부족해 한길 깊이의 호를 빙 둘러가며 팠다. 이것들이 완성된 뒤에야 몽골군은 비로소 공격을 개시했다. 몽골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달 동안이나 수 십 차례의 파상 공격을 성에 퍼부었다.

 

공격이 장기화되자 고려군민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시석(矢石)도 바닥이 나는 최후의 상태에까지 몰렸다. 성의 우물마저 말라 식수가 떨어지고, 말과 소를 죽여 그 피를 마시는 최악의 장면이 곳곳에 나타났다. 문학 조효립은 성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러자 안찰사 박천기는 죽기를 결심하고 성의 양곡을 모두 태워 버리고 600명의 결사대를 선두로 결연하게 성밖으로 출격했다. 결사대는 빗발치는 몽골군의 화살을 뚫고 목책을 뚫었는데 결국 호를 넘지 못해 몽골군의 공격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들을 전멸시킨 몽골군은 바로 성을 공격하여 남은 노약자와 군병 300명을 전원 몰살시켰다.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봉의산성 일대는 춘주 군민들의 시신으로 뒤덮였으며, 계곡에는 그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흘러내렸다. 고려사절요와 함께 고려의 2대 사서(史書)인 고려사에도 봉의산성의 비극이 담겨져 있다.

 

고려사는 당시 서울에 있던 박항(朴恒,1227-1281)이 부모가 봉의산성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내려와보니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아서 도저히 부모의 시신 식별할 수가 없어 부모로 짐작되는 시신만 골라 매장했는데, 그 인원이 무려 300여명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봉의산성이 옥쇄와 같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국토를 지켜낸 고려군민의 영웅적 투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상상해볼 단서를  주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1254년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 사령관 자랄타이는

철군을 요청하는 고려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고려의 국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육지로 나올 것이며 두발(頭髮) 모두 몽골식으로 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몽골로 압송해 갈 것이다.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수를 할 수 없다.”

 

외교적 수사라 하더라도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는 그들이 고려를 정복하면 고려민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소리였다. 전쟁이 30년이 지나자 고려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은 유화정책으로 고려의 복종을 유도했다.

 

고려도 백성들이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주전파인 무인 정권이 붕괴하자 몽골에 굽히고 들어갔다. 복종은 하되 왕조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관대한 몽골의 양보를 받아들인 것이다.

 

강화를 위해서 고종의 아들 왕전이 방문한 쿠비라이의 성 카라코름. 고려에게 애를 먹은 쿠빌라이는 그를 크게 환대했다.

 

여튼 그 무렵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감히 맞서 보지 못한 강대한 몽골의 무력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고려는 악착같은 항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만약 고려가 여섯 번이나 침공한 몽골에게 패배하고 정복을 당했었다면?

 

몽골은 그토록 골머리를 아프게 했던 고려를 결코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점령한 뒤 지구에서 그 존재를 없애버린 금(金)나라나 남송(南宋) 서하(西夏)나 서요(西遼)처럼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원나라의 일개 군현(郡縣)으로 편입시켜 직접 통치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제주도를 빼앗아서 장기간 직할령으로 통치하다가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통치권이 자연스럽게 다음의 명(明)왕조나 청(淸)왕조로 전달되었다면 한민족은 일천년의 역사 동안 노회한 중국의 동화정책에 희생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같은 한자 문명권이고 중화족의 수도와 최단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동화되기 쉽고 빨랐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진족, 즉 만주족의 후손처럼 문자와 언어를 잃어버린 중국민족이 되어 민족 말살의 길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몽골군이 간 곳 어디에서도, 봉의산성의 전투가 보여주듯 치열하고 매서운 민족의 저항은 없었다. 또 세계가 벌벌 떨던 몽골의 강인한 기병 군단이 고려라는 반도의 작은나라한테서 볼품없는 전투를 펼친적도 없었다.

  

봉의산성에서 흘린 춘주성민들의 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세월은 봉의산 밑을 흐르는 소양강처럼 유수와 같이 흐르고 고려는 조선이 되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렀다. 몽골군의 침공으로 대량 학살이 감행된 봉의산성은 한국 국방사에서 1,000년 가까이 숨어 있다가 1950년 다시 얼굴을 나타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때도 봉의산은 그 숨겨온 전략적 요충지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바로 춘천 방어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6사단의 사단 사령부와 7연대 본부가 봉의산에 있었다.

 

6.25침공시 아군과 적군의 격전이 치열했던 사농동과 옥산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봉의산의 지리적 위치

나중에 참모총장이 된 6사단장 김종오 장군을 비롯해서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북한강을 따라 남침해오는 북한군이 환히 보이는 이곳에서 25일 사농동 포병 전투와 옥산포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틀 뒤인 6월 27일 옥산포에서 승리를 거두고 후퇴한 6사단 7연대 1대대는 소양강 방어를 위해 봉의산 6부 능선에서 소양강을 따라 동쪽으로 방어선을 치고 대기, 내다리 여울에서 도강(渡江)을 시도하던 북한군 1개 중대를 섬멸하여 버렸다.

 

봉의산성의 전략적 가치만이 돋보인 것은 아니었다. 민[民]과 군[軍]이 협동하여 호국의 순절을 했던 춘천 주민의 유전인자는 그대로 그 후손에게 면면히 내려와 현대의 한국전쟁에서 크게 폭발하였다. 6,25북한 침공 초전의 국군 대승에는 춘천 학생들과 주민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었다

 

6,25일 침공한 북한군 선두 연대 규모의 대병력을 단 12문의 포사격만으로 저지시킨 16포병대대의 계속된 분전에는 소양강 건너 생사 공장에 저장되었던 105mm포탄 2천발을 후방으로 긴급하게 대피시킨 춘천 농고 학생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공로가 있었다.

 

춘천농고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포탄을 운반한 소양교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다리로 북 T-34 전차가 몰려와 춘천이 점령 당하였다.

 

또 7월 26일 6사단 7연대 1대대 병력이 몇 달 전 춘천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열심히 164고지 능선에 구축해준  긴 능선에 잠복했다가 북한군 연대를 기습하여 패주시킨 옥산포 전투가 있었다.

 

춘천의 학생들이 구축한 참호가 있는 164고지. 능선의 참호에서 매복하던 6사단 7연대 1대대의 1,500미터 앞에서 대돌격이 있었다.능선의 참호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민간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춘천의 방어전투는 극히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몇 주 전 춘천 대첩 선양회의 회장 황한석씨의 안내로 본인이 군시절부터 이곳 춘천을 방문할 때마다 꼭 한 번 올라가리라고 생각해두었던 봉의산에 올랐다. 비로소 수 십 년만의 바람이 성취된 것이다.

   

봉의산의 산정을 둘러싸고 건축된 산성의 벽은 천년의 세월동안 거의 다 무너지고 150미터만 남은 것을 1991년도에 다시 상당 부분 복원하여 놓았다. 그러나 올라가는 입구에 큰 비 하나만 세워 놓았을 뿐, 몽골 침공 때 봉의산성 순절 군민들의 넋을 기리는 시설은 볼것이 없었다. 

 

봉의산성에서 산화한 군민을 기리는 시설은 그 곳에서 한강을 한참 따라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행주산성이나 더 나아가 강화도에 있는 광성보 유적지의 것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것이다. 행주산성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 기념탑이 서있고 또 현충사 성격의 건물도 있다.

   

봉의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춘천은 이제 전철과 고속도로로 서울과 연결되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도착이 가능하다. 공간상으로 보면 1,500만의 인구가 사는 수도권의 일부가 되었다. 좋은 시설이라면 다수의 방문객들의 발길을 끌 가능성이 아주 크다. 춘천 시내에 있는 봉의산성의 접근성은 행주산성이나 광성보 요새보다도 훨씬 더 좋다고 생각된다.

 

봉의산 서쪽에 보이는 춘천 시가지 - 미군이 주둔하다가 떠난 캠프 케이지의 토양 정화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고려가 세계 최강국인 몽골과 벌인 전쟁의 기간이 한국 역사에서 최장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는 몽골을 패퇴시킨 최초의 국가이다. 서두에 말한대로 봉의산의 전적지는 군민들이 죽음의 순간에서도 절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최후까지도 타격을 주고 영겁의 순국 세계로 스스로 뛰어 들어갔다는 점은 미국의 알라모나,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보다도 그들의 충혼이 오히려 더 큰 비장함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장함이 방문하는 국민에게 주는 감동의 충격은 매우 크다고 확신한다.

 

30년전에 세운 돌비 하나가 전부인데 조금만 더 큰 투자가 있어 수도권의 참배객들의 발길을 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민족의 위대한 항쟁이 국민들에게  저평가되고 있다는 현실을 보면 이 항몽 전쟁은 크게 홍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국의 도시 춘천시가 호국 유적에 신경을 써서 봉의산성 민군의 최후 돌격의 디스플레이를 크게 확장하고 추모제 같은 이벤트가 있어, 민족의 항몽 전사를 국민에게 널리 전해졌으면 한다. (춘천 봉의산성의 옥쇄 돌격 [끝])

 

 

 

Trackbacks 0 / Comments 1

  • 2014.10.29 22:50

    잘봤습니다.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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