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돛단배 간첩선이 내려왔다.

 

 

 

 

 

 

 

 

 

북한은 휴전이 되고 나서부터 남한 침투를 부단히 시도하였다. 휴전 직후에는 휴전선을 넘는 육상 침투가 주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해상 침투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최초의 북한 해상 침투 사건 중의 하나는 이미 소멸의 길을 가고 있던 지리산의 공비들을 재점화 시켜 보겠다고 북한이 19558월에 침투시킨 남녀 간첩단들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지리산에서 공비들이 활동 중이던 한국 전쟁 때 남조선에서 유격전을 할 만한 곳은 지리산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정작 능력이 되지 않아 남한 공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아 공비들의 원망을 샀었다하지만 전후에도 김일성은 지리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리산 공비들이 소멸하자 태백산맥을 그 다음지역으로 보고 196811, 120여명의 간첩들을 울진 삼척지역으로 남파하지만 민관군의 토벌작전에 거의 소탕당해 버렸다. 그 뒤로 김일성은 자신의 노망상태에서 벗어 난 듯 산악 유격활동의 꿈을 접었다. (69년 울진 삼척지구 토벌전에서 그 해 41.21 사태에 영향을 받고 창설한 향토 예비군의 역할이 지대했었다. 1.21 사태를 지시한 김일성은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에서 지리산 침투를 목적으로 내려 보낸 남자 4명 여자 1명의 혼성 간첩 팀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분자들이었다. 이 간첩들이 침투하자말자 그 존재가 노출되어 경찰들은 비상을 걸고 매복 대기했다.

 

822일 저녁 경남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 독립 가옥에 이들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함양 경찰서 경비 주임 정재택 씨가 (현재 경우 장학회 이사) 지휘하는 일개 특공대가 돌입해 대위 이종식과 일당을 체포했다. 이들을 심문해 전남 영광으로 해상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60년대 들어오면서 북한의 해상 침투는 점점 전문화 되었다. 단순한 어선을 사용하던 그들은 일본 어선으로 위장한 쾌속 간첩선을 투입해서 침입하였다. 그러나 침투의 기술이 축적되자 대형 간첩선보다는 속도도 빠르고 더 위장이 잘 되는 연안 어선같은 소형의 어선에 강력한 일제 모터들을 단 쾌속정을 개발해 이것을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쾌속 간첩선은 시속 30~40노트의 고속으로 해상을 질주할 수가 있었는데 60년대 가난한 한국 해군은 이런 간첩선을 잡을 소형 경비정이 없어서 그 정도의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군함은 대형 구축함밖에 없었다. 이후 남한의 경제 상태가 나아지고 해군의 대응도 발달하여 국산 PK정같은 것들을 개발해 간첩선들을 격침하거나, 해군함에서 이륙한 알루엣 헬리콥터가 간첩선을 격침하기도 하였다.

 

해군의 대응 능력이 발달하자 북한은 간첩 모선이 먼 바다에서 발진시키는 반잠수정부터 잠수가 가능한 잠수정까지 개발해 침투를 시도했. 한국에 침투했다가 나포되어 전시하는 간첩선들을 보면 겉은 허술해 보여도 내부는 무서운 속력을 내는 강력한 엔진을 세 개나 장착하고 일제 어업용 레이더인 후루노 레이더를 장비하기도 했었다.

 

82mm 무반동총까지 장비한 것도 출현해 동해안에서는 이 무반동총을 육지에 대고 발사하여 민간인 가족들이 여럿 죽기도 했다. 기껏 커봐야 연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새우젓 배 크기의 소형 어선이 이토록 숨겨진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법이란 항상 상식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다. 북한은 항상 이런 고성능의 간첩선만 사용하지 않았었다. 19699월 전북 옥구군 오식도에 6톤 크기의 간첩선이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이 간첩선은 엔진이 없는 무동력선이었다. 이 때만 해도 한국의 연안에는 무동력선인 황포 돛배가 많았었다. 오고 가는 동력으로는 광목을 두 겹으로 엮어서 황토물을 들인 황포 돛대를 사용했고 육지로 접안할 때는 대형 노를 저었.

 

그런 배들은 항해 할 것도 없이 주로 육지에서 보이는 곳 목에 설치한 그물로 어로를 했는데 잠자리 채같은 것을 물속에 넣어 조류에 밀려드는 새우잡이등 잡어를 잡았. 그 무렵 해군이나 경찰의 인재라도 간첩들이 이런 무동력선을 타고 침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본 사진은 위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 무동력선에는 3 명의 승무원과 1명의 침투 간첩이 타고 있었다. 침투 간첩은 섬 태생으로 전쟁 중에 부역하다가 월북했던 자였는데 그의 형이 아직도 섬에 살고 있었다. 북한은 군산항 출입 어구인 이곳을 중요한 요지로 보고 선(-조직망)을 대려고 시도했다.

 

간첩선은 918일 해역에 나타나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어로 작업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다음날 섬 출신의 간첩을 상륙시켜 친지에게 접선시키고자 했는데 그가 상륙해서 찾아간 형의 집에는 다 어로작업을 나가고 그 해 여고를 졸업하고 아직 직업을 잡지 못한채 쉬고 있는 딸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침투한 공작원에게는 조카였.

 

하지만 섬에서 자랐지만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그가 전쟁 때 월북했다는 삼촌이고 공작 임무를 띄고 침투해서 아버지를 찾는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녀는 그에게 아버지를 찾아오겠다고 안심시키고 집을 나와 바로 섬의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북에서 온 삼촌은 쉽게 체포되었다. 뒤늦게 경찰서로 찾아온 형과 경찰의 정성어린 설득에 그는 전향하기로 작심하고 간첩선이 정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경찰 경비정 세 척이 출동해서 무동력 간첩선으로 접근하여 스피커로 자수를 권했지만 간첩선에서는 대답 대신 로케트 탄이 날아왔다. (B-40 척탄통인 듯)

 

 

대항하는 적을 상대로 생포를 포기한 경찰 경비정들은 포문을 열고 무동력 간첩선을 침몰시키고 간첩들을 모두 사살했다. 남한의 허점을 노린 북한의 간계(奸計)는 이로써 들통 나게 되었다. 북한이 육상 침투에 이어서 해상 침투도 중단한 것은 강릉 잠수함 사건 전후로 생각되지만 그들의 50년 가까운 해상 침투사에서 돛단배가 격침 된 이례적인 사건은 이것이 유일하다.

 

나는 이 일화를 직장 생활을 할 당시 이 섬에서 태어난 동료에게 듣고 그 후에 쭉 흥미를 가져 왔었다. 그래서 이 무동력 간첩선의 이야기를 포스팅 하려고 여러 번 관계 자료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다가 당시 발행되었던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보고 이 무동력선 간첩선의 일화가 실화임을 알게 되어 여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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