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1편-

 

 

 

 

 

 

 

 

80년대인가?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이미 죽은 베트남의 국부(國父)적인 존재인 호치민이 근세 조선의 석학인 정약용 선생의 명저(名著) 목민심서(牧民心書)애독했다는 말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썼던 책으로 일선 지방 관리의 행정 매뉴얼과 윤리 지침서격의 책이다.

 

요즈음도 꾸준한 독자가 있는 스티디 셀러로써 여러 다산 연구가들이 다산 최고 수작(秀作)중의 하나로 꼽는 명저다그 때는 30만 명의 국군이 파월되어 싸웠던 치열한 월남전의 기억이 생생했을 때였다주월(駐越) 한국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공격했었던 베트콩들과 정규 월맹군들이 자기들 아비처럼 존경하는 공산당의 괴수 호치민(胡 志明)이 정약용 선생의 책을 애독했다니 도대체가 맞지 않은 소리로 들렸다.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

 

처음에는 목민심서가 어떻게 해서 월남어로 번역 되었을까하는 치졸한 상상을 하다가 그 쪽 방향으로 지식이 축적되면서 호치민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처럼 한문에 능했었고 그가 중국에 머무를 때 목민심서를 구입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실제로 호치민은 다량의 한시를 남길만큼 한문에 능했었다.)

 

동아시아 최고 걸작 의술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진작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목민심서도 중국에서 수입되어 팔릴 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관련된 토픽성 일화가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가끔씩 점멸하듯 떠올랐다.

 

호치민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한 정도가 아니라 평생 통치의 정신적 바이블로 삼아 머리맡에 놓고 수시로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또 죽고 나서 그가 즐겨 읽던 목민심서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말도 들었다. 호치민은 북쪽의 무식한 김일성처럼 개인 숭배 같은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릇이 크고 겸손하고 소박해 베트남 인민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런 자가 목민심서를 크게 평가했다고 하니 한 때는 우리와 피나게 싸운 적국의 우두머리인 그에게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남양주군과 베트남의 하노이 시가 이 목민심서를 인연으로 자매결연을 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를 의심하는 글이 뜨기 시작했다어느 연구심 많은 분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베트남까지 찾아가 호치민 기념관을 조사해보니 전시되었다는 목민심서도 보이지 않았고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봐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는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의심의 것이었다글쎄? 아직도 살아 계신 관계자 분이 많은 한국 전쟁사에서도 아는 사람을 눈뜨고 병신 만드는 거짓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겪어 본 나로서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손에 넣어서 읽게 된 한 책에서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한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로당의 괴수였다가, 후에 김일성에게 잔인하게 제거당한 박헌영임을 알게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20세기가 개화하는 1900, 양반 출신으로 미곡상이었던 유부남 아버지와 과부로서 주막집 주모였던 어머니 사이에 서자(庶子)로 태어난 헌영은 일생을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파란만장하게 살았으나 결국 1957년 미제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이상은 그에게 비참한 죽음과 가족의 불행한 파탄을 선물했을 따름이었다박헌영은 경성고보 (현 경기 고등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가, 이루츠크 파인 고려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을 살았지만 1926년 두 번째 체포 된 뒤에 형을 살다가 거짓으로 미친 행색을 해 가석방 되었다. 석방된 그는 1928년 국내 공산당 조직의 도움을 받아 부인인 주세죽(世竹)과 함께 두만강을 거쳐 모스크바로 밀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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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죽은 함흥 영생여고보 출신으로 허정숙, 고명자등과 함께 조선 공산주의 활동 초기 여성 지도자 3 총사 중 한 명이었다. 상해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 곳에서 박헌영과 만나 여운형의 주례로 결혼했다초기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3인의 여성들

 

 

당시 경성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자 지성인이었으나 모진 인간을 만나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못 생긴 허정숙이 김 일성의 총애를 받아 북한의 여러 요직을 다 거치고 천수를 다한 사실과 대조가 된다그녀는 박헌영이 귀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현재 4.19 도서관 앞의 양복점에서 점원 노릇까지 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헌영은 세 번 체포되어 10년 가까운 형을 살았다. 그리고 이것이 1차 체포 때였다.) 더 이야기 하겠지만 주세죽은 1953년 모스크바에서 늙고 병들어 객사(客死)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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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 교육을 위해서 만든 최고 교육 기관인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을 했다. 박헌영은 이 학교에서 19291월에 입학하여 1931년 말까지 3 년간을 다녔다. (조선인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나중에 그의 아내 세죽을 빼앗아 간 김단야가 있다.)

 

그가 이곳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중에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다호치민은 상당한 국제파다. 그는 20세가 넘자 국제 여객선 주방 보조로 취직해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타고난 역마살이 있었고 요리 솜씨가 있어 밥 벌어먹을 걱정이 없었던 배경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했고, 그 후 영국으로 가 1919년까지 살았다. 그 뒤에 프랑스와 소련, 홍콩, 광동 등지에서 젊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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