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2편-

 

 

 

 

 

 

 

호치민이 베트남 혁명에 매진하고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저우 생활 당시인 192636세 때 21세의 중국인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으로 호치민이 도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그녀는 호치민을 만나지 못한 채 1991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은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호치민 전기에 아주 기묘한 글이 나온다. 미국에서 살던 1911-13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를 만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이 당시 행적을 숨긴채 활동한 박헌영을 말하며 그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한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학교 졸업후 공산주의 운동을 본격화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본인의 모스크바 체류 사실만은 끝까지 숨길 정도로 행적을 숨긴 채 활동했다.)

 

부인 증설명(曾雪明)에게 보낸 호 치민의 한문 편지 - 대단한 달필이다. 이 정도이니 목민심서는 문제없이 읽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박헌영은 그에게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선물했다그가 전해 받은 목민심서는 우리말 번역판이 아니라 순수한 한자의 원본이었으리라고 본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교육자와 말단 관리를 지낸 그의 아비가 실력있는 유학자여서 호치민은 한학을 배워 열 살 무렵에 한시(漢詩)를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한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 책에 막역한 친분이 있는 친구를 일컫는 붕우[朋友] 라는 단어를 서명으로 써주었다

 

책에 붕우(朋友)라는 서명이 있었다는 세밀한 사실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호치민에게 책을 선사한 사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당사자인 박헌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그러면 한국에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또한 이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인연에 대한 일화가 왜 월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세계의 이목이 호치민에게 집중되고 있던 60년대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80년대에야 나타나서 지금까지 띄엄띄엄 세간에 알리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아직까지 이에 관한 자료를 구할 길이 없으니 추리를 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左)과 박헌영(右)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퇴색되고 한국과 공산주의와의 접촉이 시작되면서야 호치민과 목민심서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가능성있는 추리는 이렇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후에 김일성 밑에서 외무상을 지냈다.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자주 왕래했다.

 

남쪽을 침공하였던 김일성이 유엔군의 개입으로 북으로 패주할 때 모택동을 찾아가 지원을 애걸한 사람도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호치민 뿐만 아니라 모택동과도 인연이 있었다.

 

--------------------------------------------

박헌영과 모택동간의 인연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헌영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밀출국을 하던 때에 주세죽은 임신 6개월의 임신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삭이라서 함경선 열차에서 딸을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내생각에는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박헌영은 이 딸에게 비비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32년 박헌영의 졸업 후 부부는 상해로 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딸은 모스크바의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졌다. 스타소바 육아원은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 자녀를 위한 고급 육아원이었다.

   

그러나 1933년 박헌영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다. 그로서는 세 번째 체포였다홀로 남은 주세죽은 할 수없이 소련으로 돌아가 동료 공산주의 운동가 김단야와 눈이 맞아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김 비탈리라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 되어 총살되고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에서 조선어 교정원으로 일하던 주세죽은 중앙 아시아 크질오르다의 방직공장 개찰원(開札員)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그녀는 15년간 그 곳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김단야와 주세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곧 죽고 말았다.

 

그녀는 힘든 고생 끝에 박헌영이가 북한의 요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스타린에게 몇 번이나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젊은 내연의 처가 있던 박헌영은 그녀를 외면했다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진 비비안나는 틈을 내 크질오르다에서 찾아온 주세죽과는 몇 년에 한 번 씩은 만났지만 아버지 박헌영과는 해방 후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와 비비안나가 그가 외상으로 있던 북한으로 갔을 때에만 만났을 뿐이었.

 

비비안나는 비록 고아원에서 컸지만 소련 민속 무용의 천재로서 일찍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고급 육아원에는 모택동의 두 아들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죽은 큰아들 모안영과 조금 정신이 부실한 둘째 아들 모안청이었다. 두 사람은 모택동이 혁명을 한답시고 일찍 집을 나갔고 어머지 양개혜가 장개석군에 총살당하자 상해의 거리에서 고아처럼 살다가 공산당 조직에 의해서 구출되어 극비리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두 아들들은 전후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모택동(左)과 모안영(右) - 모택동과 만났을 때 박헌영은 두 사람의 자식이 얽힌 인연을 틀림없이 들먹였을 것으로 본다. 

 

스타소바 육아원에서 박헌영의 딸 비비안나와 모택동의 아들 안영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택동 아들 모안영은 한국 전쟁때 미군기의 네이팜탄에 죽었다

 

 

 

 

Trackbacks 0 / Comments 0

댓글 남기기

블로그 인기 키워드

Tistory Cumulus Flash tag cloud by requires Flash Player 9 or better.

링크

re_footerlink.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