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3편-

 

 

 

 

 

 

 

박헌영은 외상으로서 국제 활동중에 소련 아니면 중국에서 호치민과 상봉했거나 제 삼자를 통해서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여기에 그럴 가능성이 있을꺼라 예상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일성은 1950330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중.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오른쪽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주세죽이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무려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스타린을 세 번이나 만나 남한 침공 허락을 졸라댔다. 스타린의 허락을 받자 다시 두 사람은 513일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나 남한 침공의 동의를 받았다당시 호치민도 1950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같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과 스타린의 대 프랑스 항쟁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었다.

 

박헌영

 

그가 어느 정도 오래 모스크바에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박헌영과 만났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양국의 거물이 되어 상봉했을 때 호치민은 사실이건 아니건 인사치레라도 그가 선사한 목민심서를 잘 읽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이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사실의 시초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박헌영은 호치민과 접촉 후 이런 사실을 김일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라는데 공산주의자들도 예외일 리가 없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1949년 방문때이다.

   

박헌영과 목민심서의 일화를 포함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많은 북의 남로당 간부들은 거의 처형당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또 북에서 알만한 인간이 있다해도 김일성의 치하에서 감히 미제 간첩으로 몰려죽은 박헌영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탄압 당하자 북한에서 중국이나 소련으로 탈출해나간 인사중에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르고 한국의 기자 같은 사람들을 만난 기회에 이 사실을 털어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럴만한 사람들을 보면 남로당의 신진 간부로 활동하다가 월북해서 노동당 유럽국장까지 지냈지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탈출한 박갑동씨나 소련파였으나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강동 정치 학원장 박병률씨 등을 예상한다. 

 

박갑동 씨는 한국에 여러 번 왔었고, 국내 주요 신문에 자기의 회고록을 연재 하는 등 한국 언론과 관계가 깊었었다. 소련으로 망명했던 박병률 씨도 한국에 다녀간바 있다이런 연유로 탄생한 목민심서의 일화가 연줄을 타고 한국 사회에 한 역사 정보로써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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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 씨는 국내에서 1983년에 박헌영에 관한 책을 출판했었다. 이 책에는 목민심서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생존한 남로당원으로서 박헌영이 아끼는 후배였던 그가 목민심서의 일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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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자기의 최후를 부르는 짓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을 부추겨서 남침을 주도한 것은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없는 민족 범죄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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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김일성은 대남 침략을 생각했을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예상과 박헌영이 큰 소리를 친 20만 명의 지하 남로당원의 봉기를 기대하고 남한 붕괴는 서울만 점령하면 다 될 줄 알았다그래서 전쟁이 빠르면 3일 이내에 끝나리라고 기대했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김일성이 그가 월북 남로당을 사냥할 때 한 구실이 되었다. 두 한심한 인간들의 치졸한 욕심이 남북 민족에게 끔찍한 3년의 전란의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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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좌)과 박헌영(우)

 

하지만 목민심서의 일화를 떠나서 박헌영을 보면 참 기구한 인생을 살다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헌영을 소개하는 김에 여기에 한마디 더 그의 가족과 그의 최후를 말해본다. 박헌영이 마지막 순간에 추구했던 것은 인민의 해방이니 노동자의 천하니하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아니었고, 목민심서가 가르치는 치민(治民)의 철학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동댕이 치고 떠나야 하는 처와 두 명의 자식들에 대한 근심과 애정이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자식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추구하다가 죽음으로 보답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었다첫 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 낳은 박비비안나라는 딸은 고아원에서 부모없이 불운하게 자라야했다. (그래도 천부적인 무용솜씨로 이 불행을 극복하고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인 남편과 잘 살고 있다.)

 

소련 유학후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어 조선에 돌아온 1933년으로 부터 6년간의 형무소살이를 하고 1939년에 출감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비밀 아지트의 위장생활을 위해서 조직에서 알선해주어 위장 동거하던 10대 산골처녀 정순년과 눈이 맞아 아들 박병삼을 낳았다.

 

그러나 정순년은 아기를 두고 아버지에게 끌려가 다시 시집을 가야했고 박헌영이 월북 후 버려진 아들은 박헌영의 어머니와 그의 이복형 박지영이 기르다가 다시 박헌영의 남로당 동지인 김삼룡과 김제술이 맡아 길렀다. 아들 박병삼은 김제술이 지리산 남부군 이현상을 만나려고 찾아간 화엄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원경 스님이 된 박병삼은 나중에 어머니를 찾아 만났고 세월이 지나자 다시 언론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를 찾아가 누나 박비비안나와 상봉하였다. 누나 비비안나가 동생인 그의 초청으로 한국에 한 번 왔을 때 박헌영의 딸이 왔다고 언론의 대단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었다.

 

원경 스님은 아직도 오산의 어느 절 주지스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박헌영의 윗 자녀는 그래도 이데올로기를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운명을 비교적 잘 극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그러나 박헌영에게는 이미 한국 언론에 잘 알려진 두 자녀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낳은 아들, 딸의 남매가 있었다박헌영이 첫째 주세죽과 중간의 여인 정순년외에 북한 외무상 때 김일성도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윤옥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박헌영과 윤옥

  

미모의 그녀는 남한에서부터 박헌영의 비서였다가 박헌영을 찾아 월북해서 역시 외무상인 그의 비서를 하다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되었지만 금슬이 좋아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알려지기는 박헌영은 윤옥과의 사이에 낳은 첫 딸에게는 나타샤라는 이름을 주었고 두 번째 아들에게는 세르게이라는 소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성 세상에서 불안해지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식들만은 김일성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기르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작명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런 박헌영에게 최후가 왔다. 한국전이 끝나가는 19523월 김 일성은 그와 남로당 일파를 몽땅 체포하여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단체 누명을 씌워주고 숙청을 개시했다.

 

이강국, 이승엽, 임화, 한설야, 설정식등 한 때 남한의 지성인으로 행세했었던 그들은 명분뿐인 재판을 받고 줄줄이 처형당했다. 그래도 소련과 중국의 참견으로 박헌영은 1957년까지 그런대로 감옥에서 실낱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처형일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일 늦은 1957년 설을 채택한다.)

 

19577월 연안파와 소련파가 주도한 8월 종파 사업에 놀라 발광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처형할 것을 소련 비밀경찰 출신 이며 내무상인 방학세에게 지시하였다1957719일 밤에 박헌영을 끌어내서 야산으로 데려가는 방학세에게 박 헌영은 일제나 김일성의 재판정에서 쏟아내던 독한 사자후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나약한 넋두리를 했다.

 

오늘 죽을 것은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 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애뜻한 애정은 마지막으로 그를 김일성 같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에게 매달리는 환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방학세는 못 들은 척하고 그의 머리에 두 발의 권총 실탄을 안겼다그리고 한반도를 소란스럽게 뒤흔들던 인간중의 하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품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아내 윤옥과 두 자녀의 소식은 어디에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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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요 2016.10.08 02:17

    모스크바 단체사진 계속 잘못된 정보 확인도 없이 돌아다니는데,
    주세죽 오른쪽 세번쨰가 아니라 맨 왼쪽입니다.
    위키에 누가 잘못 올려놓은거 제가 고쳐서 다시 캡션 올렸는데, 아직도 사실확인도 없이 인물 확인도 없이 자꾸 오른쪽 세번쨰라고 하네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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