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밸리 전투 -3-

 

 

 

 

 

 

 

 

채근현 전투

 

 

아침 7시경부터 중공군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왔다중공군 소부대가 먼저 어둠과 덤불을 이용해서 B중대가 점령하고 있던 195고지 서쪽 측면에 은밀히 침투하였다. 이 중공군은 64군의 116사 전위 부대였다이곳을 방어하는 소대장은 존 몰 중위였다. 중공군은 백기를 들고 위장 항복하는 척 하다가 급습하는 전통적인 기만술로 영국군을 고지에서 몰아내고 195고지를 점령했다위장 투항은 한국 전쟁동안 공산군이 자주 써먹던 상투 전술이다.

 

 


 

195고지는 더 낮은 서쪽 고지로 연결된다195고지 약간 아래에서 본 안부현장에서 보면 두 봉우리 사이 계곡으로 통하는 좌측 측면 사면이 아주 접근하기 좋게 되어 있다.

 

 


 

 

한 지역을 공격할 때 그 지역 최고 고지부터 확보하는 전술의 기본이 중공군의 전술에서도 적용이 되었다공산군의 주공도 얼스터 대대가 예상했었던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부터 왔다. 이곳은 D중대가 방어하던 곳이었다현재는 선유동 계곡으로 불리며 고양시에 속한다. 나중에 유명해진 불미지리는 이 계곡의 남쪽 입구에 있다.

   

중공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영국군 D중대와 남쪽의 미군 E중대를 공격했다중공군은 백주인데도 해피 밸리의 이날 밤을 공포스럽게 만든 대나무 피리로 교신하면서 키 작은 관목(灌木)더미를 은폐물로 사용하며 전진해왔다.

 

 

중공군이 공격해온 서쪽 측면

 

 

중공군들이 서쪽 측면에서 공격한 D중대 진지 - 이곳은 고양시에 속한다.

 

 

중공군들이 공격한 방향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얼스터 배속 쿠퍼 부대의 크루세이더 전차의 직접 투입이 힘든 지역이었고 포병 관측도 힘든 곳이었다. D중대가 지키던 고지도 빼앗기고 이어서 미군 E중대가 지키던 남쪽의 127고지도 빼앗겼다. 지휘관 토니 블레이크 소령은 적들이 진지 강화를 하기 전에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그는 수색 소대[battle patrol]와 전방의 A 중대를 고지에서 빼내 반격에 가담시켰다대대가 가진 가용한 모든 화력이 고지의 중공군에게 퍼부어졌다박격포와 탱크들이 한참을 두들긴 후 A중대가 가파른 D중대 고지로 올라가며 반격을 했다고지에 다가간 영국군은 대공포판을 깔고 미 공군에게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F-80 전폭기 1개 편대 4대가 날아와서 중공군이 B중대와 D중대를 몰아내고 점령했었던 고지에 네이팜 탄을 투하하였다. 고지를 점령했던 중공군은 백주에 숨을 곳이 없었다정확한 네이팜 공격으로 고지 점령 중공군 전원 몰살이라는 위력을 발휘했다

 

A중대가 고지를 쉽게 탈환하자 영국군은 지역에서 제일 높은 B중대의 고지[195고지]도 공격해서 재점령하였다점심이 조금 지나 끝난 이 전투에서 적군은 약 30구의 시체와 2명의 포로를 남기고 도주했다얼스터 대대에는 네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얼스터 대대는 작년 11월 초순 한국에 온 이래 최초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주민이 목격한 기총 소사

 

 

이 공중 공격을 목격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까 말한 이정옥씨 집의 둘째 아들 이석기씨와 셋째 아들 이준기씨 형제는 이 공중 공격을 내내 지켜보았다그 때 석기씨는 13, 준기씨는 11살의 초등학교 학생들이었다두 형제와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나중에 기습 현장이 되는 곡릉 철교를 지나 불미지리 부근에서 점심을 먹던 중 미군의 F-80 편대가 내습해왔다.

   

F-80기들은 이씨 가족 위치의 북쪽, 미군 E중대가 빼앗긴 고지와 그 동북쪽 능선의 B중대와 D중대가 점령했었던 산봉우리들에 네이팜 탄 투하부터 실행하였다. 네이팜 탄을 투하한 미군 전폭기들은 이어서 중공군이 밀집한 계곡에 연달아 기총소사를 했는데 전투기들이 타격하던 곳은 미군 E중대의 북쪽이었고 D중대의 전면 서쪽 방향의 선유동 계곡이었다.

   

형제는 그 쪽을 영국군이 아니라 미군들의 전투 구역이라고 오인하고 미 공군이 영국군보다 자기 군대만 지원해주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중공군 간부들은 공습이 있자 피리와 나팔을 더 요란하게 불어내며 공포에 질려 움추리는 부대원들을 질타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기총 소사가 연달아 가해지자 중공군들 모두가 겁을 먹고 퇴각했는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영국군 박격포의 전과

 

 

얼스터 대대가 거둔 채근현 전투 승리에는 4.2인치 박격포 사격의 기여가 아주 컸다고 한다얼스터 대대 박격포에 대한 단편을 들려주는 이가 있었다. 이석기씨는 피난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온지 며칠 뒤에 195고지 서쪽 선유동 계곡으로 나무를 하러갔다바로 중공군이 몰려나왔다가 미 전투기 공격에 패주했었던 계곡이다.

   

그는 산자락 밤나무 숲 바로 앞 고랑에 중공군 시체 7-8구가 나란히 눞여있는 것을 보았다모두 포탄의 파편들에 맞아 그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군복에 굳어있었다. 개머리판이 부러진 두 개의 총기도 시체 무더기 옆에 나란히 세워진체 놓여져 있었다.

 

그들 바로 옆 밤나무 숲에 박격포탄이 떨어진 자국에 여기 저기 있었고 시체에 가까운 큰 밤나무들은 나뭇가지가 다 부러지고 나무 아래에 핏자국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중공군들은 밤나무 숲에 숨어있다가 얼스터 대대 박격포의 집중 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들은 전부 동계 위장을 위해 흰 옷을 입고 있었다처참하게 부서진 사체들은 이미 변색이 되어가고 있었다단지 후퇴하는 전우들이 가려주었는지 네 명의 얼굴에는 수건이 덮여 있었던 것이 석기씨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해피 밸리 후방에 북한군 침투조 출현

 

 

이씨 집안의 이야기를 앞에서 소개한 부분으로 다시 돌려보자이씨 집안의 채근현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채근현 전투 후 요란한 총성이 잦아들고 중공군이 물러가자 제궁동[삼상리]의 집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두 형제의 어머니는 집에 그냥 있다가는 자기와 아들 두 형제들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아침을 먹자마자 서둘러 짐을 꾸려서 집에서 부리던 소와 수레에 짐을 실었다. 옆 집의 친척에게 권유하여 같이 마을을 떠났다. 중공군의 공격이 있던 13일 새벽부터 북쪽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있었다이들은 대규모가 아니라 가족 단위로 작은 그룹들이었다.

 

이 중에 남으로 통하는 쟁고개를 올라가기 전 이 씨 집에 들러 아침 밥을 얻어 먹는 피난민도 있었다. 얼스터 대대는 해피 밸리에 들어왔을 때부터 쟁고개 앞에 보초를 배치하고 적의 접근을 경계하게 하였다중공군이 나타나기 전에도 행인들은 오고가고 했었다보초 근무를 하던 얼스터 대대 초병들은 길 옆에 모닥불을 펴놓고 행인들을 지켜봤으나 특별히 검문하는 일은 없었다.

 

 

 

 

오른쪽에 채근현의 이름을 제공한 제궁동 마을이 있고 이 앞에 얼스터 검문소가 있었다. 쟁고개롤 올라가는 입구다왼쪽으로 A 중대가 점령하였던 고지가 보인다.

 

 


 

북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검문을 하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하니 불가능했다얼스터의 전사는 이들 피난민들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해피 밸리의 비극을 낳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후방 침투는 공산군의 특기였었다.

 

북한은 한국 전쟁 시작부터 한국군이나 미군의 후방을 노려서 정보원이나 민심 교란 요원이나 전투 부대원까지도 투입하였었다. 오로지 얼굴이 같고 언어가 같은 민족끼리 하는 전쟁이었기에 이런 전술이 발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후방 침투 전술이 극성을 부려 미군의 골치를 앓게 했다.

 

나는 해피 밸리 전투가 영국군과 중공군의 사이에 벌어졌었기 때문에 스파이들의 영국군 후방 침투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었다그러나 해피 밸리로 몰려오던 중공군의 선두에 북한군 대대가 있었고 채근현 전투가 있던 날 어두운 새벽 영국군 전방 수색대가 북한군과 교전을 하고 몇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북한군이 파견한 침투조의 후방 침투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를 이 씨 가족들의 증언에서 더 정확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이 씨 가족이 간 피난길은 얼스터 대대의 철수로와 같았다. 해피 밸리를 벗어나 메네미 고개를 넘어 긴 고갯길을 걸으면 고개가 끝나고 강 하나가 나온다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인 창릉천이다.

 

현재는 이 강너머에 수많은 은평구의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메네미 고개에서 이곳까지는 직선거리로 2km의 거리가 있고 이씨 일가가 떠나온 고향 집과 이곳은 약 5km의 거리가 있다지금은 다리가 놓여진 창릉천은 그 때 다리는 없었고 징검 다리가 있었다.

   

이 씨 가족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채근현 전투 소식에 놀랐던데다가 L-19 정찰기가 상공을 떠돌며 계속된 피난 권유 방송의 영향으로 무조건 집을 나온 피난민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건너편에는 한국군[또는 경찰]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대기하는 동안 갑자기 피난민중의 여러 명이 총기를 꺼내들고 다리 건너에서 검문하는 한국군들에게 몇 발의 사격을 가했다. 놀란 강 건너 한국군은 기관총을 포함해서 여러 정의 화기로 대응 사격을 했다.

   

이씨 일가의 피난짐을 끌던 소가 너무 놀라서 도랑에 뛰어들어 콘크리트 배수관에 머리를 들이 밀고 숨으려고 할 정도의 총격이었다이어서 하늘에서 조명탄이 펑하고 터지며 주위가 대낮같이 훤해지자 총질을 해댄 괴한들은 피난민 대열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강 건너의 병력 규모를 알기 위한 탐색 공격일 것으로 생각된다이석기씨는 괴한들이 쏴댄 무기가 '따쿵! 따쿵'하는 소리와 "다르륵! 다르륵!"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이들 무기가 모신나강 소총과 따발총임을 알았다괴한들이 쏴댄 무기가 은닉하기 쉬운 권총이 아니라 소지가 힘들게 긴 따쿵총과 따발총이라면 이들은 피난민에 묻어 침투한 침투조가 아니라 얼스터 대대보다 훨씬 앞서 철수한 미군 E중대가 비워둔 선유동 계곡 입구로 침투한 북한 정규군임들일 가능성이 크다.

 

 

[좌측을 방어하던 미 육군 E중대의 조기 철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이야기 한다.]

 

이 사건은 해피 배리 전투가 있기 서너 시간 전의 초저녁에 벌어진 일이다. 해피 밸리에서 이곳 먼 곳까지 정탐을 나올 정도라면 해피 밸리에는 더 많은 북한군 침투조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봐야한다중공군들과 북한군에게 이들의 침투조의 보고를 통해 얼스터 대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정보 노출은 곧 비극으로 연결된다.

   

이들 침투조는 공격 대기하고 있던 중공군에게 얼스터 대대의 철수로가 통과하는 메네미 고개의 최적 매복 위치를 보고했고 옆 미군 부대가 철수했다는 정보도 보고하였고 얼스터 대대가 철수를 개시했다는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중공군의 공격 위치에서 본 쟁고개 최고 195고지- B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옛 격전지를 방문한 로빈 찰리 대령과 딸 캐서린.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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